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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역사이야기] 민족주의적? 사대주의적? 김부식의 <삼국사기>

1145년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은 왕명을 받들어 올리는 형식으로 <삼국사기(三國史記)>를 편찬했다. 현존하는 역사서 중 가장 오랜 <삼국사기>의 저술에 중요한 전기가 된 사건은 묘청(妙淸)의 난이었다. 이 난은 1135년(인종 13년) 묘청을 중심으로 한 서경(평양) 천도파가 개경 문벌귀족에 대항해 일으킨 정변이다. 김부식은 총사령관 신분으로 묘청의 난을 진압했고, 그 후 역사에 대한 중요성을 환기시키려는 취지에서 <삼국사기>를 저술했다. 1096년(숙종 1년) 관직에 진출한 김부식은 이후 20여 년 동안 관료로서 명성을 쌓았다. 1116년(예종 11년) 7월엔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여섯 달 동안 머물며 송 휘종의 융숭한 대접을 받고, <자치통감> 한 질을 갖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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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문신 김부식과 <삼국사기>

 

김부식이 인종의 총애를 받으며 관료로서 큰 역할을 하던 때 묘청의 난이 일어났다. 서경을 기반으로 한 묘청은 서경 천도를 주도했고, 한때 인종은 서경에 대화궁을 건설할 정도로 천도의 뜻을 굳혀갔다. 그러나 김부식 등 개경 세력이 반대하자 인종은 천도의 뜻을 접었다. 이에 묘청은 서경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명분은 고려 조정이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와 굴욕적인 사대외교 관계를 맺은 것이었다. 묘청은 국호를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 휘하 부대를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 하고 서북지역의 호응을 받으며 기세 좋게 출발했다. 그러나 묘청은 반란 직후 내부 세력에 의해 한 달 만에 살해당하고, 1년 가까이 저항하던 반란군은 1136년 김부식이 이끄는 정부군에 의해 진압됐다.

묘청의 난을 진압한 후 인종은 관직에서 물러나 있던 김부식에게 삼국의 역사를 편찬할 것을 명했다. 역사에 대한 김부식의 재능을 활용하고 묘청 일파와 같은 무모한 모험주의자가 다시 등장하는 것을 경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김부식은 4년여 작업 끝에 사마천이 쓴 <사기> 체제를 참조해 기전체(紀傳體)의 <삼국사기>를 완성했다. 편찬 목적은 왕에게 올린 표문인 '진삼국사표(進三國史表)'에 잘 드러난다.

김부식은 해동 삼국의 역사가 오래돼 마땅히 기록해야 하고, 중국 문헌들은 우리 역사를 지나치게 간략히 기록하고 있으니 우리 것을 자세히 써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한 왕, 신하, 백성의 잘잘못을 가려 후세에 교훈을 삼기 위해서라고 했다. 마지막엔 "비록 명산(名山)의 사고(史庫)에 길이 간직할 만한 책은 못 되더라도 장독 덮개를 바르는 데에 쓰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라면서 겸손함을 표시했다.

김부식은 신라를 중심에 두고 <삼국사기>를 서술했다. 삼국의 건국 연대에서 신라를 가장 오래된 것으로 기록했으며, 당나라와 연합해 삼국 통일의 초석을 마련한 김춘추의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연개소문을 극히 비판적으로 기록한 것은 묘청의 난을 의식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한말 민족주의 역사학자 신채호는 묘청의 난을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최대의 사건'으로 평가하면서 김부식의 사대주의적 역사관을 강력히 비판했다. 그러나 최근 역사학계에선 <삼국사기>가 고고학적 성과와 일치하는 부분이 많고, 비교적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역사를 기록했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20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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