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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장사'들이 힘을 펼치는 세상을 꿈꾸며…

기골이 장대한 두 장사가 있었단다. 황토골 출신 농부 억쇠와 외지에서 들어온 득보가 그들이다. 억쇠는 엄청난 장사지만 그 힘을 썼다가는 큰일을 저지르게 되어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집안의 우려를 받아들여 힘을 억제하고 다만 노모를 모시고 혼자 살아간다.

억쇠만큼 기골이 장대하고 힘깨나 쓰는 득보는 억쇠보다 예닐곱 정도 젊어 보인다. 그 둘이 주막의 싸움판에서 만나게 된다. 서로 힘을 겨루다가 둘은 이내 맞수임을 알아차리고는 "자기의 몸이 공중으로 스르르 떠오르는 듯한 즐거움이 가슴에 솟아오름"을 느낀다.

 

장사

 

맞수의 만남을 통해 에너지가 고양되고 충일하는 느낌을 갖게 되는 사연은 간단하다. 천하장사로 태어났으되 이제껏 억쇠는 그 힘을 제대로 써볼 기회를 갖지 못했던 터였다. 남몰래 밤중에 바위를 지고 산 위아래를 오르내려보기도 했지만 그것 가지고는 어림없는 노릇이었다. 필경 여의주를 잃은 용의 신세, 그래서 한갓 이무기나 능구렁이의 신세를 벗어날 수 없었기에 그 비애가 남달랐다.

득보의 경우도 사정은 비슷하다. 이복형제의 틈에서 대장장이 노릇을 하다가 형제 하나를 죽이고 도회로 도망쳤고, 거기서 대갓집 부인과 통정하다가 발각되어 다시 도망쳐야 했고, 확실치는 않으나 이복 조카딸 분이에게 딸을 낳게 하고 황토골까지 흘러들어온 인물이었다.

이런 사정의 두 맞수가 징검다리 하나를 사이에 둔 채 마주 보고 살면서, 때때로 황토골 잔등 너머 아늑한 산골짜기로 가서 극단적 힘겨루기의 카니발을 벌인다. "억쇠의 입에 문 득보의 어깨살을 질겅질겅 씹다 벌건 핏덩어리를 입에서 뱉어내고, 그러고는 술 항아리를 기울여 술을 몇 사발 마시고는 쓰러져버렸다"처럼 두 장사의 힘겨루기란 가히 육체 파괴적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즐길 뿐만 아니라 생명까지 담보로 삼는 그 폭력적 힘겨루기를 통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쾌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사디즘이나 마조히즘만 가지고는 해명하기 어려운 심리가 거기에 있다. 그들이 범상한 인물이 아닌 까닭이다. 여의주를 잃은 용이요, 날개 잃은 장사요, 절맥(絶脈)당한 황토골의 장사이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잃어버린 여의주를 환각 속의 힘겨루기에서 발견하는 비범한 인물들인 까닭이다.

이미 짐작했겠지만, 1939년 작 김동리의 '황토기' 이야기다. 여의주를 잃은 용과도 같은 두 장사의 무모한 힘겨루기는 비극적 아이러니를 연출한다. 비범한 힘을 지녔으되 그 힘을 현실에서 제대로 쓸 수 없었던 장사들은 그런 현실을 원망하며 그 힘을 엉뚱하게 낭비하고 탕진한다. 그 비범한 힘을 제대로 쓸 수 있는 현실적 상황이나 논리가 끝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였던 1930년대 말의 정치·사회적 상황이나 신분적 질곡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제 뜻과 힘을 제대로 펼치지 못한 채 좌절과 곡절을 겪었던 맥락을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어디 그때뿐이었겠는가.

언제 어느 때나 여의주를 잃은 용 같은 처지를 한탄하는 경우는 적지 않았던 것 같다. 열심히 '노오력'했지만 아직 일자리를 갖지 못한 이들, 와신상담 끝에 취직을 하긴 했지만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들, 혹은 세상이 자기를 제대로 알아주지 않는다고 슬퍼하거나 노하는 군상들 등 황토골 두 장사의 계보들을 헤아려보기는 어렵지 않다.

안타까운 일이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이런 장사들이 많은 세상은 우울하다. 장사들이 저마다의 힘을 창의적으로 발휘하면서 협력과 상생의 시너지 를 창출할 수 있는 열린 상황이라면, 황토골의 비극을 조금씩이나마 넘어설 수 있겠다.


· 우찬제 (서강대 교수·문학평론가) 2016. 0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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