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결혼기념일을 앞두고 유명 셰프가 운영하는 한 이탈리안 식당에 예약 신청을 해놓은 박모 씨. 그는 1인당 15만 원인 디너 코스 메뉴 2인분을 예약했다. 그런데 예약 당일 아내가 한식이 먹고 싶다고 하자 부랴부랴 다른 식당을 알아보고는 발길을 돌렸다. 예약한 식당에는 취소 전화조차 걸지 않았다. 귀찮기도 했고 굳이 전화로까지 못 간다는 말을 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시간 해당 식당은 박 씨가 예약한 전망 좋은 좌석에 ‘예약석’ 팻말을 올려놓고 부부를 기다렸다. 하지만 30분, 한 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전화도 받지 않았다. 문제는 이런 빈 테이블이 비단 박 씨의 예약석만은 아니었다는 것. 이날도 식당은 넘쳐나는 ‘노쇼(No-Show : 예약 부도)’ 고객들 때문에 최소 100만 원가량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자영업자 ‘노쇼’로 막대한 피해
공정위 등 노쇼 근절 캠페인 시작
“고객은 왕이다. ‘노쇼’ 고객은 왕이 아니라 폭군이다.”
요즘 서비스업계에서 우스갯소리처럼 들리는 말이다. 노쇼 고객 때문에 생기는 피해가 심각함을 드러내는 말이기도 하다.
예약해놓고 연락도 없이 나타나지 않는 걸 예약 부도, 이른바 노쇼라고 한다. 최근 이 노쇼가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노쇼가 서비스업 종사자들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경제연구원 등에 따르면 노쇼 때문에 5대 주요 서비스 업종(음식점, 병원, 미용실, 공연장, 고속버스)이 지난 한 해 입은 매출 손실은 4조5000억 원, 고용 손실은 무려 10만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비스업체에 식재료나 미용용품 등을 공급하는 연관 제조업체의 손실까지 합치면 경제적 손해는 매년 8조2700억 원에 이른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예약 문화는 부끄러운 수준이다. 한 일간지가 5대 서비스 부문 100개 업체를 상대로 실시한 조사 결과 평균 예약 부도율은 15%. 이 가운데 식당의 예약 부도율은 20%로 평균보다 5%포인트 높았다. 이는 2001년 한국소비자원 조사 때(11.2%)보다 두 배 가까이 늘어난 수치다.
이처럼 노쇼 고객 때문에 생기는 자영업자의 피해 사례가 늘자 공정거래위원회(이하 공정위)가 팔을 걷어붙였다. 공정위는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 한국소비자원 등과 함께 노쇼 근절을 위한 홍보 동영상과 포스터를 제작해 배포를 시작했다. 특히 이번 홍보 동영상에는 백종원, 이연복 등 유명 셰프가 출연해 배포 전부터 화제를 모았다.

▶ 공정거래위원회와 한국소비자원 등이 함께 만든 노쇼 근절 포스터.
포스터는 “예약은 약속입니다”를 메인 카피로 약속 취소 시 해당 영업장에 취소 전화를 하는 것이 매너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또한 노쇼가 사업자뿐 아니라 선의의 소비자에게도 피해를 줄 수 있음을 강조한다.
동영상과 포스터는 네이버와 카카오 등 주요 포털에 게재된다. 또한 공정위는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 기업체, 학교 등에도 게시하고 교육에 활용될 수 있도록 제공할 예정이다. 포스터는 음식점과 미용실, 병원 등에 부착해 국민이 쉽게 볼 수 있도록 접근성을 높인다는 방침이다.
공정위는 이번 홍보 동영상과 포스터의 제작•배포를 통해 노쇼 근절 필요성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또한 소비자단체와 사업자단체, 공공기관 등과 협업해 ‘정부3.0’의 핵심 가치인 공유, 소통, 협력을 실현하는 데 기여할 것으로 보고 있다.
공정위는 매년 4억~6억 원의 예산을 들여 시민 2만여 명을 대상으로 소비자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교육은 보이스피싱과 사기 범죄 대처법, 소비자 환불 규정 등 주로 소비자 권익을 지키는 데 필요한 상식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올해부터는 노쇼의 문제점과 이를 근절하기 위한 올바른 소비자 행태를 가르치는 과목을 추가할 계획이다. 정재찬 공정거래위원장은 “블랙컨슈머는 중소사업자에게 피해를 주고 불필요한 사회적, 경제적 비용을 발생시킨다”며 “노쇼 근절 캠페인에 본격적으로 동참하겠다”고 밝혔다.
식당 업주•국립휴양림•대기업•스타 셰프도
“이젠 바꾸자” 한목소리
식당 업주들도 노쇼 근절에 나섰다. 한국외식업중앙회의 ‘노쇼는 노!’ 캠페인이 대표적이다. 전국 42만 개 식당이 회원으로 가입한 한국외식업중앙회는 서울 시내 음식점을 시작으로 내년부터는 전국 음식점에 ‘노쇼는 노!’ 스티커와 냅킨을 배포하기로 했다.
제갈창균 한국외식업중앙회장은 “노쇼 문제는 단순히 식당만의 문제가 아니다”라며 “이번 캠페인을 통해 사회 전 분야에서 신뢰 문화가 정착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국립자연휴양림관리소는 올해 1월부터 상습적인 노쇼 고객에게 페널티를 부과하고 있다. 전국 29개 국립 자연휴양림의 객실과 캠핑장을 예약해놓고 연락 없이 예약을 두 번 깬 이용자에 대해 90일간 휴양림을 예약할 수 없게 한 것. 또 여러 캠핑장에 중복 예약하고 막바지에 한 곳만 선택하는 행태를 막기 위해 한 번에 예약 대기를 할 수 있는 캠핑장 개수도 종전 최대 9곳에서 3곳으로 제한하기로 했다.
지난해 국립휴양림 캠핑장에 예약 신청한 총 8만4881건 중 10.4%가 노쇼였다. 예약 시각을 30분에서 한 시간 앞두고 예약을 취소하는 사례도 7.2%나 됐다.
노쇼 근절에 나선 기업도 있다. 국내 대기업 중에선 처음으로 아시아나항공이 노쇼 근절 캠페인에 동참했다. 아시아나항공은 2015년 12월 사내 인터넷 게시판에 ‘예약 부도 ZERO, 예약은 나에 대한 믿음과 신뢰입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올려 전 임직원에게 캠페인을 알렸다.
이어 올해 1월에는 포스코그룹이 ‘노쇼 없애기’ 캠페인을 시작했다. 노쇼 관행이 조직의 효율성과 구성원 간의 신뢰를 갉아먹는 주된 요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포스코그룹은 ‘포스코와 45개 계열사 전 임직원 3만5000명은 노쇼는 물론 예약 시각이 임박해서 예약을 취소하거나 변경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캐치프레이즈를 사내 게시판에 올렸다. 매주 월~금요일 아침 사내 방송에서 노쇼 사례와 그 폐해를 다룬 영상도 방영하고 사내 교육도 실시하기로 했다.
유명 셰프들도 공개적으로 노쇼를 비판하고 나섰다. 공중파 등 각종 TV 프로그램에 출연 중인 최현석 셰프는 자신의 누리소통망(SNS)에 “노쇼 손님들은 부끄러운 줄 알라!”라는 글을 올리며 일침을 가했다. 최 씨는 동료 셰프들과 자비를 들여 노쇼 근절 캠페인 영상을 만들기도 했다. ‘노쇼 노셰프’라는 영상에서 이들은 “노쇼를 하면 셰프도 없습니다”, “노쇼는 예의 없는 행동입니다”라고 외친다.
글 · 김가영 (위클리 공감 기자) 2016.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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