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우리 민족은 ‘책의 민족’

김시덕 |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 교수
한국인은 ‘책의 민족’이라고 생각한다. 이 땅에 산 사람들은 한반도 바깥에서 전해진 책에 적혀 있는 내용을 신뢰하여 목숨까지 바쳤고, 그리하여 전 세계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역사적 성취를 이루어왔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천주교다. 한반도는 선교사나 신부가 들어오기 전에 책이 먼저 들어오고, 그 책을 읽은 사람들이 천주교 신자가 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이렇게 책으로 배운 가르침을 믿은 수십만 명의 신자들이 목숨을 바쳐서 오늘날 천주교의 기반을 닦았다. 이는 세계적으로 한반도에서만 나타난 독특한 역사다. 이웃나라 일본도 수십만 명의 순교자를 낳았지만, 그들이 천주교를 믿은 것은 이베리아 반도의 선교사들이 일본에 간 뒤였다. 또한 자유민주주의를 책으로 배운 현대 한국의 시민들은 4·19 혁명과 5·18 민주화운동 그리고 최근 책에 적힌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목숨 바쳐 이 땅에 구현하고 있다. 한국의 민주주의를 흔히 ‘바깥에서 이식된 민주주의’라고 하지만, 서유럽과 미국 등 일부 국가를 제외하면 한국처럼 교과서적인 자유민주주의를 시민들의 힘으로 만들어가고 있는 곳은 많지 않다. 오늘날, 한국은 유라시아 대륙 서쪽 끝의 독일이나 인도 등과 함께 세계의 자유민주주의를 선도하고 있는 유라시아 대륙 동쪽의 등불이 됐다. 외부에서 선진적인 종교·정치 체제가 수립되고 책에 기록되어 한반도로 전래되었을 때, 한국인들은 책에 적힌 보편적인 내용을 믿고 체현함으로써 한반도가 처한 고립적 상황을 돌파하려 한 것이다. 책을 통한 실천으로 지금까지 한국인은 숱한 어려움을 이기고 놀라운 업적들을 일궈냈다. 새해에도 놀라운 성장을 해나갈 한국을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기다림의 미덕 장맛, 융합 생각할 때

이건호 | 샘표 식문화연구소 지미원 원장
발효음식은 우리 한식문화의 정수다. 정성을 다해 만드는 된장, 고추장, 간장 등 장류는 한식이 이상적인 자연건강식으로 자리 잡은 데 크게 한몫했다.
장류는 그야말로 기다림의 미덕으로 만들어진다. 예컨대 된장의 경우, 원료인 콩을 심고 수확해 메주를 쑨 다음 말려서 숙성시키기까지 꼬박 1년이 걸린다. 노력과 집념의 시간이다. 이러한 된장은 단순한 먹을거리가 아니었다. 신성한 음식이었다. 된장을 담글 때는 3일 전부터 부정한 일을 피하고 당일에는 목욕재계를 하는 게 필수였다.
요즘 시대는 굉장히 빨리 돌아간다.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뉴스가 쏟아지고 트렌드도 재빨리 바뀐다. 정신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바쁜 일상이다. 발효음식에는 이럴 때일수록 느릿한 걸음으로 가라, 돌아보지 못한 면들을 돌아보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듯하다.
조상이 남긴 ‘기다림과 돌아봄의 미덕’인 장류를 현세대는 어떻게 계승해야 할까.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21세기 식생활은 1차적인 소금 맛, 소스 맛의 시대를 지나 제3의 맛, 즉 발효의 맛이 지배할 것”이라 했다. 실제로 서양의 대표적 발효음식인 치즈는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고 있다. 다양성과 유연함으로 활용도를 높여 다른 음식문화와 잘 어우러지는 법을 개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장류는 다른 음식문화와 융합되기가 그리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전통성, 발효음식의 DNA는 지켜가되 현시대에 맞는 진화된 장이 필요해 보인다.
현대인은 수많은 정보 속에 산다. 때문에 조상들이 장을 어떻게 만들었는지는 검색 한 번으로 알 수 있다. 하지만 조상들이 이를 ‘왜’ 만들었는지는 집중하지 않는다. 인고의 시간 끝에 만들어진 장류. 단순히 ‘간을 맞추기 위해’ 탄생하지는 않았다고 본다. 조상들이 건넨 기다림의 미덕, 이제는 융합의 차원에서 풀어야 할 때다.
위기에 유난히 강한 한민족

최병윤 | BY테크놀로지 회장
우리 민족은 위기 때 강했다. 위기관리 능력이 뛰어났다. 요약하자면 항전(抗戰)과 단결의 민족이라 할 수 있다. 먼저, 고려의 삼별초를 보자. 몽골군이 쳐들어왔을 때 삼별초는 강화도에서 남해안으로 장소를 이동해가며 끝까지 항전했다. 비록 그들은 산화했지만 대몽 의식은 백성들에게 그대로 전승됐다.
조선 때 임진왜란은 그야말로 역사상 가장 참혹한 국란(國亂)이었다. 임진왜란을 기준으로 조선 사회를 전기와 후기로 나눌 만큼 왜란의 영향은 컸다. 1392년 건국 후 조선 사회는 100년이 지나면서 구조적 모순에 빠지기 시작했다. 국가 지배체제가 무너졌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다. 관군의 무능은 극에 달했다. 왜군의 침략이 예상됐음에도 조정은 이를 무시했다. 그런 상황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관군과 백성은 무참히 당했다. 그때 의병이 일어났다. 농민이 주력군이었고, 전직 관료와 유학자들이 의병장을 맡았다. 조정(국가)이 시킨 것도 아니었다. 오로지 나라를 구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군대를 일으킨 것이다. 향토 중심으로 조직된 의병은 지역을 공격해온 왜군에게 큰 타격을 줬다.
시대는 흘러 6·25 전쟁 때는 어떤가.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군번도 없는 학도병들이 전국 곳곳에서 조직됐다. 현대판 의병이라 할 수 있다. 꽃다운 나이에 목숨을 던진 그들 덕분에 대한민국은 기사회생했다.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 때도 우리는 금 모으기 운동으로 ‘의병 활동’을 했다. 지금 우리나라가 힘들다고 하지만 우리 민족은 위기 때 강했던 것처럼, 나는 대한민국이 반드시 성공하리라 믿는다.
눈썰미도 한국 문화의 경쟁력

이칠용 | 사단법인 한국공예예술가협회 회장
온돌방(구들방)과 소반은 가족의 중심이요, 서로 대화를 하며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우리 민족만의 고유 문화다. 오죽하면 근래 잘못된 사회 현실을 보면서 ‘밥상머리 교육의 필요성’까지 대두되고 있을까. 온돌방은 아랫목이 따뜻하기 때문에 항상 집안의 어른, 약자의 몫으로 위아래가 분명하고 가풍을 세우는 데 큰 몫을 했다. 하나의 민족이 모여 국가를 구성하고 이 지구상에서 오랫동안 종족 보존과 생활 터전을 구축하는 데 있어 전통문화는 ‘법’과 ‘제도권’보다 우선한다고 봐야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전통문화유산은 (공예 쪽에서 볼 때) 거의 ‘수공예’ 문화에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솜씨’, ‘눈썰미’의 우수성을 세계 석학들도 극찬하고 있다. 한지, 옻칠, 유기, 전통옹기, 도자기 등 전통공예 종목에 담겨 있는 독특성을 최대한 살려 무공해 식생활 용품을 연구 개발해야 한다. 일본에선 이미 1940년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옻칠을 활용한 금속 무기류를 제작한 적이 있다. 우리도 자동차, 조선, 유람선, 해저 광케이블, 잠수함 등 공산품과 군수품에 옻칠을 활용할 수 있다고 본다. 요컨대 한국 문화의 경쟁력은 눈썰미, 솜씨, 오랜 역사 속의 경험에서 나온 경륜의 발굴과 연구에 있다.
놋그릇서 배우는 절제의 미학

백정림 | 이고갤러리 관장
우리 조상들이 남긴 정신문화유산의 대표 키워드를 꼽자면 아무래도 ‘절제’다. 절제의 미학은 놋(유기)그릇에 잘 드러나 있다. 외형의 화려함보다 내실을 기했기 때문에 1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놋그릇은 신라시대 때 탄생했다. 당시에는 전문적으로 놋그릇을 다루는 ‘철유전’이라는 상설기구를 설치할 만큼 놋그릇에 대한 선호도가 높았다. 고려시대에 들어서는 각종 생활용기를 유기로 만들기 시작했으며, 조선시대에는 건국 초기부터 국가에서 동(구리)을 채굴해 유기 생산을 장려했다. 놋그릇을 전담 생산하는 ‘유장’은 이때 국가 공무원으로 제도화됐다.
놋그릇의 이상적인 배합은 구리 78%, 주석 22%다. 합금의 비율이 다르거나 불순물이 섞이면 두드리는 과정에서 깨진다. 불에 달군 합금을 무려 9단계 이상에 걸쳐 수작업해야 비로소 놋그릇이 탄생한다. 그만큼 공이 많이 든다.
만드는 것뿐만이 아니라 관리도 힘들다. 시집살이보다 더 힘든 것이 놋그릇 닦기라 할 정도였다. 그런데도 왕실과 양반가에서는 놋그릇을 즐겨 썼다. 항독성이 있기 때문이다. 독성 있는 음식을 담아내면 바로 변색이 된다. 품질이 뛰어난 유기는 농약 성분도 감지하고, 식중독균마저 없애는 것으로 드러났다. 뿐만 아니라 유기가 숨을 쉬기 때문에 음식을 담아두면 오랫동안 신선도를 유지할 수 있고, 보온과 보냉 효과도 뛰어나다. 요즘 유행하는 빙수 프랜차이즈에서 놋그릇을 쓰는 이유도 그래서다. 이처럼 놋그릇은 현대 사회에서도 식탁 위에서 제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다.
최근 들어 ‘미니멀 라이프’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품질만 남기고 뺄 수 있는 건 빼자는 ‘절제’의 생활방식이다. 신라시대 놋그릇의 미학이 21세기 ‘미니멀리즘’과 그 궤를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절제된 선으로 이뤄진 모양새는 소박하지만, 기능적인 면에서는 무려 1000년을 앞서 나간 셈이다. 이 같은 정신유산의 또 다른 1000년을 기약하는 건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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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