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평생 나쁜 짓은 안 했으니 떳떳하죠. 그걸 나라에서 인정한 것 같아요. 떳떳하게 살아온 것, 그게 재산이죠.”
제4기 국민추천포상 시상식에서 국민포장을 받은 이상차(73) 씨의 수상 소감이다. 그의 소감은 곧은 성품만큼이나 간결했다.
그는 ‘봉사’라는 단어조차 어색했을 1970년부터 남을 돕기 시작했다. 시작하기보다 꾸준히 이어가기 어려운 것이 봉사다. 그러나 그는 개인적 사정이 좋지 않았던 3년을 제외하고는 지난 45년 동안 늘 같은 모습으로 도움의 손길을 전해왔다. ‘국내 최장기 기부자’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그는 우리나라 봉사의 산 역사나 다름없다. 경제 상황이나 트렌드가 바뀌듯 봉사의 형태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계속 변해왔다.
처음 그는 헌옷을 깨끗이 세탁해 소년촌(고아원)에 가져다주었다. 누구든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가난했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양말, 치약, 칫솔 같은 생필품을 건넸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학용품을 선물했고, 당시 인기 먹을거리였던 라면을 여러 박스 기부하기도 했다. 노인을 위한 봉사도 했다. 1970년부터 매년 경로당 노인들에게 여름에 삼계탕, 겨울에는 육개장을 대접했다. 그가 비용을 대면 부녀회원들이 음식을 만들어서 경로잔치를 열었다. 경로잔치는 20년 동안 이어졌다.
배고프던 시절 생각하며 사랑을 나누다
“노인잔치를 하러 갔는데, 사람들이 ‘어느 당에서 왔느냐’고 묻더라고요. 그 정도로 일반인 봉사가 낯설 때였어요.”
1990년대에 접어들자 사회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 먹고살 만해졌으니, 경로잔치는 더 이상 필요치 않았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쌀’이었다. 홀로 사는 노인들에게 매달 10kg씩 쌀을 보내기 시작했다. 쌀과 함께 생필품도 보냈으며, 겨울에는 내의와 연탄도 보냈다. 그가 후원하는 노인은 20명에서 시작해 지금은 70~80명이 된다. 한 달에 나가는 쌀값만 200만 원이다. 2011년부터는 캄보디아 우물 파기 사업도 후원한다. 우물 하나 파는 데 70만 원이 들어간다. 2013년부터는 홀몸노인들에게 쌀뿐 아니라 밑반찬도 지원하기 시작했다. 그가 매달 일정 금액을 지불하면 자원봉사자 5명이 모여 반찬 20인 분을 만들어 배달하는 방식이다.
그는 “고아 아닌 고아로 어렵게 살았다”고 고백했다. 아버지를 북한에 두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으며, 어머니가 일을 하게 되자 외할머니에게 맡겨졌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밥 한 공기를 세 번씩 나눠 먹는 것이 일상이었다.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수면제를 먹고 죽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약국에서 수면제를 한꺼번에 여러 개 살 수 없었기에 서대문에서 마포까지 걸어가면서 약국 하나 발견하면 수면제 하나 사고 울고, 다른 약국에서 수면제 하나 사고 울고…. 제게도 그러던 시절이 있었어요.”
그는 17세가 됐을 때 구두 만드는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19세에는 마포에 작은 구두공장을 차렸으며, 명동에 위치한 백화점에 구두 가게를 열었다. 이어 남대문으로 가게를 옮겨 1995년부터는 구두 도매상을 운영했다.
돈을 벌기 시작하자 어려웠던 시간을 떠올리게 됐고 기부로 그 결심을 실천하게 됐다. 그러나 그는 봉사가 오히려 자신에게 큰 기쁨을 주었다고 말한다.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 잘된 학생들은 고마운 마음을 전하기 위해 그를 다시 찾아오기도 한다. 더 없이 큰 기쁨을 느끼는 순간이다.
“학생들은 잘되면 저를 찾아오지만, 노인들은 때가 되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돼요. 노인 봉사는 허무하죠. 그래도 노인 봉사를 으뜸 봉사라고 합니다. 정말 아무 욕심 없이 해야 가능하기 때문이죠.”
그가 열심히 하고 있는 봉사 중 ‘생일 케이크 봉사’가 있다. 생일을 맞은 홀몸노인에게 생일 케이크를 배달하는 봉사인데, 생일 축하 노래도 불러주고 선물도 증정한다. 이 따뜻한 생일 파티에는 인근 학원 학생들이 참여하기도 하고, 동네 떡집에서 떡을 선뜻 내놓기도 한다. 생일 케이크 봉사는 쌀과 반찬, 옷을 가져다줄 때와 또 다른 기쁨이 있다고 한다.
“생일 파티는 엔도르핀이 많이 도는 봉사예요. 생일 축하를 받는 사람들은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들이 있구나’ 하고 행복해하죠. 예전에 어떤 분이 전화를 걸어온 적이 있어요. 제가 매년 그분의 어머니께 생일 케이크를 갖다 드렸는데 그렇게 행복해하실 수 없었다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그 생각이 나더랍니다.”
일 년 열두 달 기부하는 분위기 만들어나가야
그는 “봉사를 하다 보면 자식이 잘되고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고 믿고 있다. 아버지의 모습을 자녀들도 자연스럽게 보고 배웠다. 피아노를 전공한 큰딸은 저소득층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쳐주었다. 아들은 그 자신도 놀랄 정도로 기부에 아낌이 없다. 아내 역시 조선족 사람들이 자립하는 데 도움 주는 일을 하고 있다.
이제 사업에서 손을 뗀 그에게 봉사는 제2의 직업이 됐다. 매달 기부하는 것에서 벗어나 여러 후원자들을 모집하고 그들과 함께 더 큰 사랑을 만들어가고 있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 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은 옛말이다. 그는 기회가 닿을 때마다 적극적으로 봉사를 장려하고 홍보하는 일에도 앞장서고 있다.
“겨울에만 봉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러나 어려운 이웃들에게는 일 년 열두 달 언제든 도움의 손길이 필요해요. 봉사에 대한 개념이 바뀌어야 하죠. 기부문화를 전파해야 사회가 아름다워진다고 생각해요. 사랑이 커지면 범죄자가 줄어들어요. 범죄가 줄면 사회가 밝아지죠.”
그는 마지막으로, 봉사에 뜻은 있지만 돈이 없거나 방법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조언한다.
“요즘에는 돈도 중요하지만, 시간을 투자하는 봉사가 더 필요해요. 직접 반찬을 만들거나 목욕을 시켜주는 것은 물론, 아픈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위로해주는 것도 봉사가 될 수 있습니다. 마음먹었다면 지금부터 시작해보세요!”
글· 두경아(위클리공감 기자) 201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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