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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아이들 모습 다친 다리보다 더 아픕니다"

"두려움에 찬 눈빛의 아이들, 그게 제가 본 마지막 모습이었어요. 무서워하지 말라고 내가 먼저 뛰어내린 건… 그 친구들이 없었으면 저도 그때 배 밖으로 안 나왔을 텐데… 이 자리엔 저만 있네요."

"이제 우리가 그 영웅을 도울 때입니다."

병원에서 마주한 최재영(51) 씨의 두 눈이 벌겋다. 잠을 제대로 못 잔 탓이라 했다. 세월호 침몰 사고가 발생한지 1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밤엔 잠을 청하기 어렵단다. 환자복 아래로는 두 다리를 감싼 붕대가 보인다. 당시 배가 기울어지며 아이들을 향해 넘어지는 온수통을 받치다 뜨거운 물이 다리 위로 쏟아져 3도 화상을 입었다. 사고 직후부터 계속 치료를 받았지만 얼마 전부터야 혼자 걸을 수 있게 됐다.

희생자 304명(사망자 295명, 실종자 9명)을 낸 지난해 세월호 사고 당시 화물차를 싣고 배에 올랐던 최 씨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평생 치료를 해야 하는 화상을 당했고, 언제 사그라들지 모를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눈앞에 두고도 구하지 못한 학생들이 가장 가슴 아프다.

 

학생들 눈앞에서 구하지 못한 안타까움
마지막 구명조끼 여학생에게 양보

“배의 3층 매점에서 라면을 먹으려고 뜨거운 물을 받고 있는데 갑자기 배가 기울면서 온수통이 넘어가는 거예요. 뒤 쪽에 학생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동료 기사와 함께 얼른 손으로 온수통을 떠받쳤죠.

그러다 지하에서 화물들이 연쇄적으로 넘어지는 소리가 ‘쾅쾅쾅’ 나더니 배가 50도 정도 기울면서 온수통이 완전히 넘어가버렸고, 얼굴과 다리 위로 뜨거운 물이 쏟아졌어요. 피부 껍질이 벗겨지고 피와 진물이 흐르기 시작했죠. 배가 어떻게 될 거란 생각도 못할만큼 너무 아팠어요.”

그러나 배는 점점 더 기울고 사람들은 우왕좌왕했다. 상처를 돌볼 새는 없었다. 최 씨는 또 다른 동료 화물차 기사에게 방 안에 있는 구명조끼들을 가져오라고 했다. 구명조끼가 들어 있는 함은 방 양쪽으로 있는데 배가 기울었기 때문에 한쪽에 있는 것들밖에 꺼낼 수 없었다. 동료는 마지막 남은 조끼 하나를 화상을 입은 최 씨에게 건넸다. 그런데 최 씨 눈앞에 구명조끼를 받지 못한 여학생들이 눈에 띄었다.

“나가려고 출입문 쪽을 봤는데 거기 구명조끼를 못 입은 여학생 셋이 있더라고요. 일단 저와 동료의 조끼를 벗어줬어요. 다른 어른들한테도 우선 아이들에게 조끼를 입히자고 했는데 다들 제 것을 내주진 않더군요.”

최 씨는 3층에 함께 있던 승무원 고(故) 박지영 씨에게 선장에게 연락해보라 했지만 무전은 끝까지 응답하지 않았다. 3층 난간과 해수면과의 거리는 2m, 다시 1m, 어느새 30cm…. 최 씨는 주변 사람들에게 “배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소리쳤다. 그러나 구명보트는 배와 30m쯤 떨어진 곳에 기다리고 있었다. 출입문 앞에 서 있던 여학생 세 명은 두려워하며 나가지 못했다. 최 씨가 먼저 뛰어내렸다.

“아저씨도 구명조끼 안 입었다, 얼른 뛰어내리라고 했지만 끝까지 못 뛰어내리더라고요. 두려움에 찬 눈빛의 아이들. 그게 제가 본 마지막 모습이었어요. 무서워하지 말라고 내가 먼저 뛰어내린 건데… 그 친구들이 없었으면 저도 그때 배 밖으로 안 나왔을 텐데… 이 자리엔 저만 있네요.”

이후 최 씨는 아이들을 찾기 위해 수소문했지만 단원고 학생들에게는 접근 금지가 내려진 상황이었다. 이제 아이들의 얼굴은 희미해졌다. 그저 꿈속에서 마주할밖에.

“요즘도 자주 꾸는 꿈이 있어요. 화물차를 타고 인천항에 배를 타러 가요. 그런데 저만 남겨두고 배가 출발해요. 바다를 향해 떠나는 배 안의 사람들이 제게 손을 흔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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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영 씨는 세월호 사고 당시 학생들을 향해 넘어지는 온수통을 받치다 다리에 3도 화상을 입어 지난 3월 보건복지부로부터 의상자로 선정됐다. 최 씨는 앞으로 치료비 부담으로 어려움을 겪는 화상 환자들을 도울 계획이라고 말했다.

 

세월호 의상자 선정
앞으로 화상 환자들 돕고 싶어

지난 3월 최재영 씨는 보건복지부 의사상자심사위원회에서 의상자(5급)로 선정됐다. 의사상자는 자신의 직무와는 상관없이 위험에 처한 사람의 신체 또는 재산을 구하다가 사망하거나 몸을 다친 사람을 대상으로 선정해 지원하는 제도다. 세월호 탑승객 가운데 의상자는 최 씨가 유일하다.

하지만 의상자로 선정된 뒤 최 씨의 마음이 더 무거워지는 순간이 있다. 정기적인 모임을 갖는 유가족들과 만날 때다. 혼자만 득을 본 것 같아 괜스레 미안하다. 의상자로 선정된 다음 날엔 세월호 학생 10여 명을 구해 ‘파란 바지 영웅’으로 불렸던 김동수 씨의 자살 시도 소식이 전해졌다.

화물차 기사 동료의 소식은 충격이었다. 처음엔 생존자에게 무관심했던 여론이 야속했지만 이젠 세월호 사고가 아예 잊힐까 두렵다. 최 씨가 인터뷰한 기사에 대해 ‘당신은 대한민국의 영웅입니다’라며 응원해주는 댓글도 있지만, ‘세월호 소식 이제 지겹다’, ‘세월호 탑승자들 그만 좀 해라’는 등 차마 보기 힘든 말이 많아 힘들다고 했다.

여전히 최재영 씨에겐 해결해야 할 숙제가 많다. 무엇보다 전 재산이었던 화물차를 잃었다. 21년간 화물차 기사로 일한 최 씨에게 화물차는 곧 집이나 마찬가지였다. 집에서 하루를 자면 차에서는 3일을 잤고, 각종 기계류와 옷가지가 다 거기에 있었다.

한 달에 열서너 번은 배를 타고 제주로 떠났다. 그러나 화물차도, 화물차를 몰 수 있는 건강한 다리도 잃었다. 아직 대학생인 아들과 딸을 뒷바라지 하려면 10년은 더 벌어야 하는데 무얼 하며 살아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단다. 우선 할부로 산 차값 1억2000만 원에 대한 확실한 배상 대책이라도 나오길 바라고 있다.

그런 최 씨에게 최근 한 가지 숙제가 더 생겼다. 치료비 마련에 어려움을 겪는 화상 환자들을 돕는 것이다.

“예전에 같은 병원 환자 중에 형편이 어려워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다 국물을 엎어 화상을 입은 할머니가 계셨어요. 수술비 120만 원이 없어 치료를 못 받고 계신 걸 보고 병원 복지과에 도움을 요청해 수술비를 마련해드렸어요. 또 저기 저 노랑 티 입은 친구. 저 친구는 중국 동포인데 안산 공장에서 대형 화재가 나서 화상을 입었어요. 당시에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기도 했지만 다음 날 세월호 사고가 터지는 바람에 주목받지 못했고, 보상도 최소 금액만 받고 끝났죠.”

최 씨는 진료비의 70%에 달하는 화상 환자의 비급여 항목이 급여 대상으로 전환될 수 있도록 힘쓸 거라고 했다. ‘화(火)사랑’이라는 모임도 만들었다. 화상이라는 무서운 병을 가진 사람들을 따뜻하게 봐달라는 의미가 담겼다. 제도 개선을 위해 최 씨는 언론, 변호사, 정부, 그리고 국민의 관심과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제 우리가 영웅을 도울 때다.


· 조영실 (위클리 공감 기자) 2015.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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