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응답하라 1945 웅비하라 2015!
격동의 70년 온몸으로 겪은 광복둥이 소회
1945년에 태어난 광복둥이들은 살아온 세월만큼 한민족이 오랜 분단의 아픔을 겪게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격동의 세월을 거친이들은 대한민국 부흥의 주역이다. 여전히 현역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는 이인식 지식융합연구소 소장과 전용규 컴투게더 고문에게서 광복둥이의 소회와 한국 사회의 미래상에 대한 바람을 들었다.

이인식 저는 1945년 8월 22일 광주에서 태어났어요. 광복 딱 일주일후죠. 그 날이 백중날(음력7월15일)이에요. 돌아가신 부모와 조상을 기리는 날이기도 하고, 농가에서는 머슴과 일꾼들에게 돈과 휴가를 주어 즐겁게 놀도록 하는 날이죠. 육사 8기생인 아버지께선 6·25전쟁 때 전사하셨습니다. 그 바람에 할아버지께서 저를 키웠지요. 지주 집안이었는데, 격동기 농지개혁으로 갖고 있던 전답도 사라져 형편이 어려웠어요. 그런 까닭에 학창시절 수학여행을 한번도 간 적이 없어요.
전용규 저는10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난 서울 토박이로 제 생일이 음력으로 8월 15일, 추석이었어요. 당시는 구청에서 출생신고를 양력으로 받았으니까 이후 생일을 양력으로 하고 있지요. 6·25전쟁 당시 집이 서울 용산에 있었는데, 미군이 폭격을 하는 통에 저희 가족은 일단 마포구 공덕동으로 옮겨갔지요. 그러다 책방을 하던 아버지께선 책을 싣고 부산으로 가셨고, 누이는 큰집으로 가고, 그렇게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어요. 저는 어머니와 피난을 멀리가지 못하고 서울 인근에 있다보니 인민군, 중공군을 다 겪었지요.
산업입국의 시대 앞만 보고 달려왔다
이인식 힘든 시절이었어요. 할아버지께선 고시 공부를 하라고 했어요. 잃어버린 전답을 찾으라고 말이죠. 고시공부는 고향에서 해도 된다며 전남대학을 가라고 하셨는데, 저는 말을 듣지
않고 서울로 도망치다시피 올라와 서울대 공대에 들어갔어요. 고등학교때 5·16이 났는데, 당시는 국가적으로 ‘산업입국’을 강조하던 때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고시나 의사보다 공대가 우선이었어요. 취직이 잘돼 인기가 좋았죠. 저는 학교 배지 대신 공대 배지만 달고 다닐 정도로 자부심이 강했지요. 아시다시피 저희 바로 위아래 세대는 소위 ‘한강의기적’의 주역입니다. 형편이 어려워 가정교사며 갖은 아르바이트를 하던 대학 시절,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어요. 1966년 대학 3학년 1학기 등록금이 없어 쩔쩔매고 있던 겨울밤에 친구가 저금통장을 건네주더군요. 그 친구 역시 어려운 처지였는데 말입니다.
전용규 산업입국, 맞아요. 농촌을 일으키자는 분위기도 팽배했지요. 저는 그런 분위기에 따라 서울대 농대에 진학했습니다. 지금 제가 하는 일과는 180도 달랐던 거죠. 대학 시절, 설악산에 등반 갔다 조난을 당해 구사일생으로 살아온 적이 있었어요. 그런 일이 있고난 뒤 군에 입대해 집에 알리지도 않고 전쟁 중이던 월남에 갔죠. 아버지께서 나중에 그러시더군요.“ 설악산에서 네가 조난당했을 때 집에 난데없이 사망통지가 날아들었다. 거기에 월남까지 갔으니 너희 엄마가 그 충격으로 일찍 돌아가신 게다.”돌이켜보면 죄송할 따름이지요.
이인식 저는 해군장교로 복무했는데, 대학 동기 20명 중에 군대 간 친구가 손으로 꼽을 정도였어요. 지금도 군대 기피가 사회 문제가 되는데, 참으로 씁쓸한 일이지요. 어쨌든 제가 졸업할 당시는 박사 학위를 따거나 미국 유학을 가는 일은 거의 없었어요. 말씀드린 대로 산업입국 시절이라 다 취직해서 경제개발에 참여했지요. 지금은 아무리 스펙을 쌓아도 취직이 잘 안 된다니 안타깝습니다. 저는 졸업하고 럭키금성(현 LG)에 취직했어요. 벤처 붐이 일어나기 훨씬 전에 컴퓨터 분야의 전문가였죠. 처음으로‘병원관리소프트웨어’를 개발했으니까요. 30대에 기획부장과 컴퓨터 개발부장을 했으니 잘 나갔지요. 제가 직장을 다니던 시절엔 열심히 앞만 보고 달렸습니다. 그렇게 5년 만에 조그만 아파트를 마련했는데, 지금으로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요. 냉장고 한 대를 장만해도 모두가 축하한다며 박수를 쳐주던 시절이었지요.
전용규 한일협정이 체결되고 1965년인가 일본과 국교 정상화가 되자 일본 유학생들이 들어왔어요. 농촌을 일으키자는 붐에 편승해 농대를 왔지만 적성에 맞지 않더군요. 그 무렵 일본 유학생들과 교분이 많았는데, 이들로부터 광고계 이야기를 듣게 됐습니다. 아, 이거다싶었죠. 당시는 변변한 광고 회사가 없던 시절이라 졸업 후 신문사에서 운영하는 광고회사에 발을 디뎠습니다. 그러다 제약회사로 갔어요. 당시는 광고와 관련된 게 거의 이 곳밖에 없었으니까. 이후 오리콤, 제일기획, 금강기획 등을 거쳤지요. 이궤적을 보면 우리나라 산업 변천사와 일치해요. 아니 그 과정을 다 들여다볼 수 있지요. 1차 산업부터 3차 서비스 업종까지 우리나라가 경제개발을 하면서 거쳐온 산업의 발달과정 말입니다. 사회적으로는 광복, 전쟁, 4·19 혁명, 민주화 등 격동의 시대를 살아왔지만 경제적으론 우리 세대 산업역군이 일군 모든 과정을 들여다본 셈이죠.
이인식 저는 서른 후반에 다른 기업 이사로 스카우트돼 마흔여섯 살에 사표를 냈습니다. 돌아보면 열심히 달려왔는데, 가족 특히 아이들과 함께한 시간이 너무 적은 게 아쉬워요. 다행히 잘 자라 기업에서 인정받고 나름의 위치를 다지고 있지만 아이들을 보면 미안한 마음이 큽니다. 제가 젊은 시절, 사회에는 존경받는 원로가 있었어요. 시대를 증언하는 매체도 있었고요. 그런데 지금은 경제 성장과 민주화를 이뤘지만 여전히 진보 대 보수에다 지역 간, 세대 간 등의 진영 논리가 팽배해요. 여전히 남북이 분단된 현실에서 사회의 구심점이 필요합니다. 서로를 보듬고 이끌어주는 분위기가 형성돼야죠. 그래야 다가올 통일을 맞이할 수 있지요.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중요”
전용규 많은 분들이 작금의 현실을 개탄하고 있지만 우리 세대가 그랬듯이 우리에겐 더 웅비할 동력이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10퍼센트 이상의 성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북한이라는 동력이 그것이지요. 그런 만큼 남북 간 화해와 협력이 중요합니다. 정치 지도자들은 이를 명심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 민족에게는 문화적으로도 세계를 아우를 수 있는 힘이 있어요. 중국을 보세요. 사실 중원의 역사는 기마민족의 것이었지, 한족의 것이 아니었어요. 그런 기마민족의동력이 우리에게 잠재돼 있다는 말입니다.
이인식 경제적으론 잘 살게 됐지만 제 집 하나 마련하기가 힘들어요. 또 민주화가 됐지만 진영 논리로 갈라선 시대죠. 한국 사회는 앞뒤가 안 맞는 아이러니가 돼버렸어요. 이를 바로잡는 것이 이 시대의 과제지요. 모두에게 화합과 나눔을 말하기 전에 가진 자,
힘 있는 자들이 내려놔야 합니다. 정치·종교 지도자들이 먼저 내려놔야합니다. 그래야 우리 사회가 한 번 더 도약할 엔진인 ‘공감’을 이룰 것입니다.
전용규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 지도층의 도덕적 의무)’가 없는 나라,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북한이탈주민이나 조선족 등을 제대로 포용하지 못하는 사회, 이래서야 어떻게 도약을 바라겠습니까? 저는‘한 사람이 열 걸음 가는 것보다 열 사람이 한 걸음 가는 것’이 더 낫다고 봐요. 우리 시대에 필요한 격문입니다. 덧붙여 전쟁과 산업화라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살아온 사람으로서 우리 젊은 세대가 이전 세대가 겪은 야성을 되살려 개척정신을 키웠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글·박길명 (위클리공감 기자) 20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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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