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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국민행복기금 수기 공모전 수상작 2편

한국자산관리공사는 ‘항상 낮은 곳에서 소외된 이웃의 목소리를 듣겠다’는 취지로 매년 국민행복기금 수기집을 펴내고 있다. 3월 발간된 <다시 시작하는 행복 편지>에는 어둠 속 절망의 끝자락에서 희망의 불씨가 돼준 국민행복기금으로 다시 일어선 사람들의 숭고한 이야기 20편이 담겼다. 그중 두 편을 소개한다. 앞선 이들이 피운 희망의 온기가 경제적으로 소외된 이웃에게 전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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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수상 : "사랑해, 고마워, 엄마!" 그 말을 들을 때 행복했습니다

김○란

 

은행 문 앞을 또 서성인 건 큰애가 초등학교 입학하기 몇 달 전이었습니다. 이미 대출을 받은 상태였지만 아무리 고민해봐도 다른 길은 없었습니다. 돈이 돈을 벌듯, 빚은 또 다른 빚을 만들어내더군요.

톤 트럭을 산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도난을 당했습니다. 이후 시누이가 중고 트럭을 선뜻 내줬지만 오래된 차라 그런지 고쳐도 계속 고장이 났습니다. 그마저도 남편의 직장 동료가 운전연습을 하겠다며 빌려갔다가 브레이크를 밟는다는 게 되레 액셀러레이터를 밟아 앞차를 받아버렸습니다. 차는 망가질 대로 망가져 결국 폐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대출을 받아 새 차를 사게 됐고, 이후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났습니다.

차 할부금과 대출금을 갚기 위해 우리 부부는 더 열심히 일해야 했습니다. 남편이나 저나 공장 일을 했기 때문에 잔업과 특근하는 날이 잦았습니다. 덕분에 대출이자 상환이 연체되는 일은 없었지만, 세 아이에게는 늘 미안한 나날이었습니다.

공장은 오전 8시면 일을 시작하기 때문에 어린이집 원장님께 부탁해 둘째와 막내를 일찍 맡겼습니다. 큰아이는 여덟 살 때부터 여섯 살, 두 살 동생을 돌봐야 했죠. 한겨울이면 새벽 6시 반에 자는 아이들 옷 입히고 담요로 돌돌 말아 차에 태웠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보이는 거라곤 우리 가족 5명의 허연 입김뿐이었습니다. 큰아이는 아침 일찍 모든 식구가 나가버린 탓에 학교에 지각하기 일쑤였고, 한겨울엔 양말도 신지 않고 다녀 담임선생님은 엄마가 없는 걸로 알았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어린것이 대상포진에 걸렸을 땐 "도대체 아이가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으면 이런 병에 걸립니까. 엄마가 왜 이렇게 애를 방치해놓는 거예요?"라고 다그치는 의사의 호통을 듣기도 했습니다.

결국 저는 일을 그만두고 세 아이의 엄마로 살아가기로 했습니다. 대신 남편과 둘이 갚던 대출금이 연체돼 채권 추심 단계로 넘어갔고, 곧 금융채무불이행자(신용불량자)가 된다는 내용의 통지서가 집으로 날아왔습니다.

또 다른 한 통의 편지가 날아든 건 몇 달 뒤. 국민행복기금이었습니다. 혹시 사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대출했던 곳에 문의해봤습니다. 채무자의 상환 능력에 따라 채무를 조정해 미납된 대출금의 절반을, 그것도 여러 차례 나눠서 내도 좋다는 겁니다. 빚을 다 갚으면 금융채무불이행자 신분에서도 해방이라고 하더군요. 빨리 갚아야겠다는 생각에 허리띠를 졸라매고 일한 끝에 3개월 만에 모든 빚을 청산했습니다.

마지막 납부금을 내던 날, 국민행복기금에 두 번이나 전화해 이제 연체된 것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네, 없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날아갈 것만 같았습니다.

그 이후 국비 지원을 받아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땄습니다. 교육을 받는 1년 동안 경제적으로는 힘들었지만, 묵묵히 저를 응원해준 남편과 아이들에게 고마움을 느꼈습니다. 지금은 좋은 병원 원장님과 동료를 만나 일하는 엄마로 살고 있어요. 지금 이 행복이 계속될 수 있도록 더욱 열심히 살 겁니다. 그리고 평생 국민행복기금의 도움을 잊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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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상 : 끝이 보이지 않는 굴레에서 다시 꿈꾸기까지

김○기

 

로봇을 만드는 공학도가 되겠다는 꿈을 품은 소년이 있었습니다. 16년 전, 3000평이나 되던 부모님의 사과밭과 논을 태풍과 가뭄으로 한순간 잃지 않았다면 그 꿈은 이뤄졌을까요.

실의에 빠진 아버지를 더 깊은 수렁으로 떠민 건 이웃 삼촌의 달콤한 제안이었죠. 약재의 하나인 천마를 심어 팔면 별다른 기술 없이도 이윤을 많이 남길 거라는 말에 덜컥 대출을 받아 땅을 사들였지만, 그 땅이 돌밭이나 다름없는 황무지라는 걸 알게 된 건 이미 너무 늦은 후였습니다.

술 없인 하루도 못 견디는 아버지, 누나의 대학 학자금, 대출금의 압박. 열아홉 살의 제가 선택할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새벽 3시에 일어나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생선들을 실어 나르고, 80kg이 넘는 얼음포대 수백 개를 트럭에 쌓으면 아침 7시. 그런 다음엔 반월공단의 어느 화학공장으로 갑니다. 화공약품을 통에 넣는 작업이었는데, 잠결에 독한 약품을 다리에 부어 응급수술을 받은 적도 있습니다. 오전 10시부터 낮 12시까지는 건설 현장 식당에서 설거지를 했죠. 누구를 원망할 시간도 없었어요. 이렇게 하지 않으면 15평 남짓한 집마저 경매에 넘어갈 판이었으니까요.

희망 대신 좌절을 먼저 겪은 고단한 청춘이었습니다. 스물다섯 살, 2000만 원의 빚을 갚고 나서야 대학교 전기공학과에 진학했습니다. 그러나 또다시 불어난 가족의 빚으로 학업을 중단했습니다. 도배 일과 대리운전으로 7년을 몸부림친 끝에 남은 대출금은 350만 원. 350만 원만 갚으면 자유가 되는 거였습니다.

년 만에 친구들을 만나 자축하는 술 한잔을 기울이고 돌아가던 밤, 차고지로 들어가던 버스 한 대가 신호위반을 하며 저를 덮쳤고 한쪽 다리의 감각을 영원히 잃었습니다. 결국 금융채무불이행자로 등재된다는 최종 연락을 받은 게 제 나이 서른넷. 더 이상의 불행은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기로 한 그날은, 햇살 좋은 어느 일요일이었습니다.

"할머니,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돼. 조금만 참고 가면 살 수 있어. 우리 할머니 장하다."

손수레에 폐지를 가득 싣고 언덕을 오르는 할머니와 어린 손녀였습니다. 지친 할머니를 응원하며 수레를 미는 소녀와 할머니는 그 무엇도 원망하지 않는 듯 보였습니다. 손에 움켜쥔 약을 내려놓은 건 그때, 목발을 짚고 다시 일어났습니다.

그때부터 거짓말 같은 행운이 찾아오더군요. 제3금융권에 다니던 사촌 누나의 권유로 국민행복기금을 통해 10년 동안 나누어 대출금을 갚을 수 있게 됐고, 500만 원 가까이 지원을 받았습니다. 재활문화센터에서 목공예품을 만드는 걸 배워서 일할 기회도 얻었어요. 그리고 다시 꿈도 생겼습니다.

년 뒤 작은 목공예품 가게를 하며 사회복지사가 되는 꿈입니다. 내년엔 방송통신대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하려고 해요. 처음 꿈꾸었던 공학도는 아닙니다만, 누군가를 돕는 일이 제 인생의 목표가 됐습니다. 이제 편하게 잠을 잡니다. 꿈을 꿀 수 있다는 건 참 행복한 일입니다.

 

· 조영실 (위클리 공감 기자) 2015.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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