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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최고의 트라우마 치료는 ‘정의 실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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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유학시절 한 교수님이 유대인이었는데, 연구 참여자를 지칭하는 단어로 ‘subject’를 사용하여 논문 초안을 한번 써 간 적이 있다.

그 교수님은 나를 불러서 비록 다른 여러 논문에서 사용하는 단어이기는 하지만, 다시는 ‘subject’와 같이 연구 참여자를 어떤 연구에 필요한 ‘대상’만으로 표현하는 단어를 쓰지 말고 대신 ‘참여자(participant)’ 또는 ‘연구 참여 개인(individual)’으로 쓰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자신의 선대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돌아가신 사실과, 당시 나치의 연구를 빙자한 나치의 만행들에서 어떻게 연구 대상자들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고 ‘대상’으로 여겨 학대했는지, 다시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해 우리가 평소에도 얼마나 더 예민하게 주의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을 해 주셨던 기억이 있다.

나는 나치로 인한 전쟁 때문에 가족을 잃은 사람들, 민족 학살을 경험했던 유대인들 인생의 큰 상처를 그 어떤 것이 치유해줄 수 있겠는가만, 그나마 그들이 다시 새로운 삶의 현장에서 회복을 일굴 수 있었던 데는 뉘른베르크 재판이라는, 전범들에게 책임을 묻는 재판이 도움이 된 면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제대로 처벌해서 가족 잃은 상처 헤집지 말아야

1차 재판에서는 1급 전범 23명, 2차 재판에서는 유대인 학살에 일조한 의사·법조관 등 185명이 재판을 받았다. 일부는 사형, 무기징역 등으로 대량 학살에 대한 죄과를 받았고 일부는 무죄가 선고된 경우도 있었다.

유고슬라비아 내전을 겪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2005년의 연구에 따르면, 이 정치적 분쟁과 그로 인한 피해에 책임이 크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제대로 처벌받지 않은 것 같다는 사실에, 내전을 겪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감정적으로 더 큰 반응을 보이는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이러한 감정적 반응이 클수록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위험이 높았다.

사랑하는 가족, 때때로 다투기도 했고 그래서 한없이 후회스럽고 미안하기도 한 가족, 바빠서 더 시간을 같이하지 못한 가족을 한순간에 잃은 고통을 위로할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고통을 심화시키고 그 상처를 헤집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있다.

바로 화물을 과적한 사람들, 배를 불법 개조한 사람들, 안전교육을 하지 않은 사람들, 안전검사를 제대로 하지 않은 사람들, 배를 지키고 승객을 대피시킬 의무를 다하지 않은 사람들을 비롯해 책임이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분명한 죄책을 물어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또한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조치를 강구하는 것이다.

그 교수님이 연구자, 교육자라는 자신의 자리에서 어떻게 나치의 만행을 기억하고 이것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작은 노력을 했는지를 다시 기억하게 된다.

교수님께 사사받은 수백 명의 연구자들은 이제 단어 하나를 쓸 때에도 연구 참여자를 어떻게 보호하고 존중해야 하는지를 생각할 것이다.

나도 내 자리에서 그간 관행으로 여기고 잘못하고 있었던 부분은 없는지, 그때 내 나이였던 지도교수님처럼 내 삶의 자리에서 사죄의 마음으로 조그마한 노력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는지 돌아보게 된다.

글·류인균 이화여대 약학대학 석좌교수 2014.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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