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충동의 빛을 따라가는 여행만큼 매혹적인 여행이 있을까. 준비도 필요 없다. 계획은 더더욱 필요 없다. 그저 무작정 떠나고 싶은 마음, 그것이면 충분하다. 한밤중에도 ‘우리 바다 보러 가자!’ 하는 마음의 소리에 ‘그래, 좋아!’ 하며 무턱대고 따라본 적이 있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20대 시절 못해 본 그것. 충동, 혹은 거의 발작에 가까운 여행의 열망에 아무 계산 없이 따라보는 것을 나는 이제 와서 처음으로 해 봤다. 그걸 가능하게 해 준 곳이 바로 군산이었다. 밤 11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가 나는 눈이 번쩍 뜨였다.
식민지 시대의 건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아름다운 집이었다.

폭풍검색 끝에 알아낸 것은 그곳이 적산가옥이라는 것이었다.
‘히로쓰 가옥’이라고도 불리는 이 고즈넉한 옛집은 단번에 마음을 사로잡았다. 게다가 이제는 열차가 다니지 않는다는 군산의 오래된 철길마을의 사진을 보는 순간 나는 마음을 결정해 버렸다.
세면도구와 갈아입을 옷만 챙겨 10분 만에 출발 준비를 완료했다. 굼뜨기 이를 데 없는 내가 뭔가를 이렇게 빨리 해 낸 적은 처음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군산에 도착해 있었다.
추억의 골목길에 우아한 자태의 ‘히로쓰 가옥’
도착해 보니 새벽 2시 반. 숙소도 아무렇게나 눈에 보이는 대로 정해 버렸다. 원하는 게 그저 ‘군산에서의 1박 2일’이었으니 까탈부리며 숙소를 고를 이유도 없었다. 때아닌 단잠을 잔 후 설레는 군산 여행을 시작했다. 충동의 빛을 향해 따라가니 아무것도 거칠 것이 없었다.
히로쓰 가옥으로 걸어가는 길에서부터 군산은 내게 천천히 말을 걸기 시작했다. 일단 고층건물이 없어서 탁 트인 시야가 마음을 편안하게 가라앉혔다. 프랜차이즈 전문점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옛스러운 골목길은 정갈하면서도 고즈넉했다.
서울에서는 낯선 사람에게 좀처럼 말을 걸지 않는 내가 교복입은 소녀들에게 길을 물으며 오지랖 넓은 질문도 했다. “평일인데 학교에서 왜 이렇게 일찍 나왔어요? 땡땡이 친 거 아니죠?” 군산 소녀들은 까르르 웃으면서 억울해 한다. “아니에요. 수업이 일찍 끝난 거예요. 진짜예요.” 웃으며 소녀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10분쯤 걸어가니 히로쓰 가옥의 우아한 자태가 보였다. 신흥동 자체가 워낙 조용하고 깨끗했으며, 스타벅스도 파리바게트도 맥도날드도 없는 그 거리는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아직 희미하게 둥지를 틀고 있는 유년시절 우리 동네 골목길의 추억을 상기시켰다.
시간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간직된 장소들의 특징은 ‘장소란 사람을 품어 안는 것’이라는 본래의 원칙에 충실하다는 것이다.
영화 <장군의 아들>, <타짜>, <범죄와의 전쟁 : 나쁜 놈들 전성시대>, <가비> 등의 촬영지이기도 했던 히로쓰 가옥은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고 온갖 우여곡절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따뜻하게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상시 근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관리자의 친절한 안내에 따라 나는 미리 준비된 실내화를 신고 히로쓰 가옥의 방과 마루 하나하나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여름 햇살이 찬란하게 쏟아지는 정원에는 온갖 풀꽃들이 소담스럽게 자라고 있었다. 빛의 밝기와 각도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반투명 유리창과 담담한 곡선을 품은 처마, 삐걱거리지만 깨끗하게 보존된 마룻바닥, 다다미를 반듯하게 깔아놓은 방들은 들뜬 마음을 가라앉혀 주었다. 특히 2층에서 바라본 정원의 모습은 아무리 오래 바라봐도 지겹지 않을 것만 같았다.
한국에 남아 있는 유일한 일본식 사찰이라는 동국사, 근대문화유산박물관, 군산 근대문화유산 거리, 빵이 나오는 시간마다 문전성시를 이루는 ‘이성당’ 빵집, 모든 것이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하루 만에 다 구경할 수 있다는 것도 군산 여행의 큰 장점이었다.
<8월의 크리스마스>가 촬영된 그곳, ‘초원사진관’
무작정 길을 걷던 중 왠지 ‘이곳은 낯설지 않다, 언젠가 와본 것만 같다’는 느낌이 들어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곳도 있었다. 한 번도 군산에 온 적이 없는데, 이게 웬일인가 싶었다. 알고 보니 그곳은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가 촬영된 ‘초원사진관’이었다.
오래 전 가끔은 나보다 더 나를 잘 알아서 내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던 친구가 내게 준 선물이 바로 <8월의 크리스마스> 비디오테이프였다. 다섯 번이나 보고 또 본 그 영화의 골목길 구석구석이 마음 깊은 곳에 나도 모르게 남아 있었던 것이다. 다림(심은하)이 열리지 않는 초원(한석규)의 마음을 향해 돌을 던진 곳, 초원이 누구도 자신의 죽음 속으로 걸어 들어오지 못하게 자신을 단단히 봉인했던 곳, 초원사진관. 그곳에는 오래 전 같은 비디오를 보고 또 보며 눈물 흘리던 내 20대의 힘겨웠던 시기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었다.
내가 가장 가고 싶었던 곳은 경암동 철길마을이었기 때문에 나는 이곳을 마지막 여행지로 콕 점찍어 놓았다. 가장 멋진 곳은 왠지 아련한 피날레를 위해 남겨놓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하지만 철길마을은 기대했던 것만큼 기다란 철길을 보존하고 있지 못했다. 여기저기 잡동사니가 버려져 있었으며 사진에서 본 것보다 훨씬 좁고 잡초도 무성했다. 하지만 군산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은 이제 그 철길마을을 조용히 걸었던 기억이 될 것 같았다.
기차는 다닐 수 없지만 수없는 사람들이 이 철길마을에 와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서로를 모른다 해도, 만날 수 있는 기회조차 없다 해도, 우리 마음속에 담겨 있는 ‘먼 곳을 향한 그리움’의 원초적 풍경은 지극히 닮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군산 철길마을에 기차는 없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담한 협궤열차가 사람 사는 골목길을 유유히 달리던 그 시절을 향한 우리들의 버릴 수 없는 노스탤지어가 있다.
글·정여울(문학평론가) 2014.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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