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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숲으로 가는 길 <제주 동백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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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해 동안 일 때문에 제주 곶자왈과 서울을 오가며 “곶자왈이 어디냐”는 질문을 여러 차례 들었다. 최근 곶자왈이 제법 알려지면서 그 정체가 꽤 드러나기는 했지만 아직도 여전히 사람들은 묻는다.

곶자왈은 지명이 아니다. 특정 관광지의 이름도 아니다. 생소한 음절의 연속에 발음조차 뭔가 부담스럽다 보니 간혹 안면도의 꽃지해수욕장과 혼돈해 ‘곶지왈’이라고 잘못 부르는 이도 있다.

곶자왈은 제주에만 존재하는 독특한 숲을 일컫는 말로, 제주어의 ‘곶’과 ‘자왈’이라는 단어가 합쳐져 이루어진 합성어다. 제주어사전에 따르면 ‘나무와 덩굴 따위가 마구 헝클어져 수풀같이 어수선하게 된 곳’을 뜻한다. 그런데 이 정의만 놓고 보면 곶자왈은 제주가 아닌 다른 곳에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형태인 듯 여겨진다. 그러나 곶자왈 정의의 바탕에는 용암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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곶자왈은 용암이 빚은 숲이다

제주사람들은 한라산과 해안의 중간지역인 중산간지대의 숲을 대개 ‘곶’이나 ‘자왈’ 또는 ‘곶자왈’로 불러왔다. 이 중산간지대의 숲은 화산이 폭발하며 오름이 생기는 과정에서 분출한 용암이 광범위하게 뒤덮은 곳에 수십만 년 세월이 흐르면서 이루어진 숲이다. 결국 곶자왈은 오름 사이로 흘러내린 용암이 굳고 쪼개지며 생긴 크고 작은 돌 위의 숲인 것이다.

그러니 곶자왈이라는 단어는 식물이 자라는 모양인 식생뿐만 아니라 땅이 생긴 모양인 지형, 땅을 이루는 내용인 지질, 인간과 관계를 담은 인문 등을 모두 포괄하면서도, 또한 제주에만 적용되는 특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 제주에는 이런 곶자왈이 넓게 펼쳐져 곶자왈지대를 이루는 곳이 크게 네 군데 있다. 동백동산은 그 중 동부지역의 조천-함덕 곶자왈지대에 속하는 선흘곶자왈의 일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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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오름 발원 선흘곶자왈의 중심, 동백동산

동백동산은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 거문오름용암 동굴계와 그 시작점을 같이하는 선흘곶자왈의 중심이다. 조천읍 선흘리에 위치하며 제주도의 평지에 형성된 상록활엽수림지역 중 그 면적이 가장 넓다.

동백동산에는 개가시나무나 제주에서 최초로 발견된 제주고사리삼 같은 멸종위기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또한 여러 곳에 형성된 독특한 습지에 순채·물부추·어리연꽃 같은 다양한 식물이 살고 있다. 특히 용암지대에 형성되었으면서도 다양한 식물이 서식하고 있는 동백동산의 습지들은 그 생태적 가치를 인정받아 환경부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됐고, 국제적으로는 람사르협약을 통해 보전해야 할 습지로 등록됐다.

그런데 의아한 것은 동백동산을 지나는 동안 습지와 이곳에 서식하는 다른 동식물에 관한 안내표지판은 많이 볼 수 있지만 동백나무에 대한 설명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숲을 유심히 살펴보아도 동백나무가 주를 이루지 않는다. 이른 봄, 동백동산이라는 이름만 알고 붉은 물결을 이룬 동백꽃을 기대하며 이곳을 찾았다면 십중팔구 실망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동백동산은 왜 이름이 동백동산일까? 그 답은 숲의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동백나무가 귀한 자원이던 옛날 동백나무는 다른 나무들이 벌목되는 와중에도 보호대상이 되어 숲을 이루었다. 하지만 벌목이 금지되면서 구실잣밤나무나 종가시나무처럼 키가 더 크게 자라는 나무들에 밀려나 이제는 숲 가장자리라고 할 수 있는 동쪽부분에만 주로 남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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곶자왈에는 다섯 번째 계절이 있다

동백동산을 걷는 방법은 두 가지다. 서쪽 입구와 남쪽 입구 중 택할 수 있다. 왕복 탐방로가 아니므로 이쪽으로 들어가면 저쪽이 출구가 되고, 저쪽에서 들어오면 이쪽이 출구가 된다. 주차하고 가기에는 서쪽 입구가 편하지만 숲길의 흐름을 느끼며 걷기에는 반못 부근의 남쪽 입구에서 출발하는 것이 좋다.

환한 햇살을 받으며 채 5분도 걷지 못해 깊은 산에서도 경험하기 힘든 울울창창한 숲길로 들어서게 된다. 구실잣밤나무·종가시나무·조록나무·황칠나무·생달나무 같은 키 큰 나무가 하늘을 덮으니 길 위에는 조각 빛들만이 하늘이 열린 꼭 그만큼씩만 바람에 흔들린다. 길 옆의 무수한 양치식물도 덩달아 조각 빛에 반짝이며 계절을 잊게 만든다. 거목과 현무암에 악착같이 붙어 치열한 삶을 이어가는 콩짜개와 송악·마삭줄 같은 덩굴들이 곶자왈이라는 낯선 단어의 뜻을 비로소 몸으로 느끼게 해준다.

돌 투성이 위에 떨어진 씨앗은 한 줌의 흙을 찾아 바위를 움켜쥔 채 땅 속 깊숙이 뿌리를 뻗으며 제 몸을 지탱한다. 돌 틈에서 나오는 습한 기운은 이름도 대기 어려울 만큼 다양한 양치식물을 키운다. 얼기설기 쌓인 곶자왈의 돌과 돌 사이에서는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서늘한 바람이 나온다. 그래서 추운 곳과 따뜻한 곳에서 각각 서식하는 서로 다른 양치식물이 공존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 그 일부는 한겨울에도 삶을 이어간다. 이를 두고 곶자왈에는 다섯 번째 계절이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숲길의 절반쯤 걸으면 좁은 공터에 다다른다. 이렇다 할 오르막도 내리막도 한 번 없이 줄곧 평지로만 이어지던 숲길이다. 공터 바로 전 오른쪽으로 갑자기 길을 벗어나 열 걸음쯤 올라가는 돌계단이 나온다. 무시하고 지나쳐도 그만이겠지만 한번 올라가보기를 권한다. 이 길에서 만날 수 있는 가장 큰 용암 덩어리 위에 올라서서 그 틈에서 자라는 다양한 나무와 풀을 볼 수 있고, 지형지물을 생활에 활용한 옛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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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지로만 이어진 난대 상록활엽수림

돌계단은 커다란 용암 덩어리가 갈라진 자리에 옛사람들이 놓은 것이다. 현지 주민인 고평우 씨에 따르면 지금은 나무가 무성해 시야를 가리지만 예전에는 저 멀리 바다까지 내다보일 만큼 전망이 좋았다고 한다. 테우리(소나 말을 모는 목동)들이 목장의 마소가 잘 있는지 살펴보고, 또 주민들이 당번을 정해 무단 벌목을 관리감독하던 전망대 역할을 했으며, 이곳을 상돌언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상돌언덕을 지나 숲길을 계속 걷다 보면 일순간 하늘이 뻥 뚫리며 동백동산에서 가장 큰 습지 먼물깍이 나타난다. 깊고 어두운 숲길을 빠져 나오자마자 마주치는 아름다운 연못이 하늘과 구름을 담고 시시각각 변하는 모습은 숲 터널의 대미를 장식하며 쉬어갈 자리를 내준다. 연못 가장자리 볕 좋은 곳에 군데군데 놓인 의자와 쉼터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르고 이어 걸으면, 여기서부터는 한층 넓고 밝은 길이 계속돼 출구까지 햇살을 즐기며 낙낙히 걸을 수 있다.

상록활엽수로 가득한 동백동산을 찾기 좋은 계절은 겨울과 봄이다. 특히 상록활엽수가 제 역할을 다한 잎을 떨어뜨리는 4월 봄에는 한여름의 초록을 이고 푹신한 가을 낙엽길을 걷는, 이 세상 어디에서도 할 수 없는 몽환적 경험을 할 수 있다.

맨 처음 곶자왈에 들어서면 한 뿌리에서 자란 대여섯에서 많게는 열 개 이상의 줄기가 뒤틀리고 꺾이고 서로 지탱하고 피하기를 반복하며 기기묘묘하게 서 있는 자세에 놀라게 된다. 베어진 나무는 생존의 위협을 느껴 수많은 맹아에서 싹을 틔우고 새가지를 만들어낸다.

동백동산의 나무들 역시 일제강점기와 4·3사건을 지나며 불에 타거나 베어져 크게 훼손됐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숯을 만드는 일이 흔해 대부분의 큰 나무는 밑동이 잘려나갔고, 나무는 그 자리에서 수많은 새 가지를 내어 세월이 지난 지금 독특한 숲의 형태를 갖추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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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끈질기게 살아남은 숲, 그에 깃든 삶과 죽음

곶자왈은 주민들에게 생계수단이자 절체절명의 순간에는 생존의 수단이기도 했다. 4·3사건 당시 토벌대의 명령에 따라 해안마을로 피난해야 했던 주민들은 기르던 가축과 가을걷이한 곡식을 두고 차마 떠날 수 없어 임시 피난처를 찾았다. 며칠만 숨어 있으면 상황이 끝날 것이라는 생각에 찾아간 곳이 바로 숲이 우거지고 곳곳에 천연동굴이 있는 선흘곶자왈이었다. 동백동산 남쪽의 대섭이굴·목시물굴·도틀굴(반못굴) 역시 주민들이 숨어 있던 곳으로, 토벌대에 발각돼 수십 명이 처참하게 학살당한 아픔이 묻혀 있는 곳이기도 하다.

만일 동백동산 남쪽 입구를 출발 지점으로 정했다면 입구 좌우에 있는 동굴을 먼저 찾아보기를 권한다. 베어내면 다시 자라고 흙이 없으면 바위를 움켜쥐고 뿌리를 뻗는 곶자왈의 나무처럼, 혹독한 시절 씨앗 뿌려진 그 자리에서 기막히고 막막하지만 치열했던 제주인의 삶과 죽음의 흔적이 부끄러운 역사의 속살을 고개 숙여 바라보게 한다. 그 다음 만나게 되는 곶자왈의 나무들은 이전과는 좀 다를 것이다. 움켜쥐었던 것은 놓게 하고, 놓았던 것은 단단히 움켜쥐게 할 터이니.

글과 사진·이꽃리 (숲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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