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2007년 12월 25일, 서울 광진구에 있는 한 복싱 경기장에서는 세계 챔피언 방어전이 한창이었다. 35세의 노장 복서는 열 살 어린 도전자를 상대로 세계 챔피언 방어전을 치르고 있었다. 노장 선수는 뛰어난 기량을 보이며 경기의 흐름을 이끌어갔다. 그러다 경기 종료 10초를 앞두고 노장 복서가 상대편 선수의 주먹에 맞은 채 그대로 쓰러졌다.
12라운드 판정승을 거뒀지만 선수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그는 의식불명 및 뇌사 판정을 받았고 장기를 기증한 뒤 세상을 떠났다. ‘영원한 챔프’로 불리는 고(故) 최요삼 선수의 이야기다.
최요삼 선수를 비롯한 장기기증인들을 기억하기 위한 행사가 12월 8일 서울 신촌의 현대백화점 제이드홀에서 열렸다. ‘지금도 곁에 있어요’ 행사에는 뇌사 판정을 받은 후 장기를 기증하고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유가족과 장기를 이식받은 사람 등 300여 명이 참석했다. 질병관리본부와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가 마련한 이번 행사는 유가족들을 예우하고 장기기증인들을 기억하기 위해 마련됐다.
이날 행사는 최요삼 선수의 이야기를 담은 오프닝 영상으로 시작됐다. 각막·신장·간·심장 등의 장기를 6명에게 선물로 주고 떠난 최요삼 선수는 커다란 울림을 줬다. “이렇게 나의 여행은 6명의 새로운 여행이 되었습니다”라는 멘트가 장내에 흘러나오자 여기저기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도 곁에 있어요’ 행사에서는 장기기증인들과 이식인들의 사연이 함께 소개됐다. 이날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 친선대사로 위촉된 배우 최일화 씨는 7년 전 세상을 떠난 김학빈 군의 어머니가 쓴 편지 일부를 낭독했다.

8명에게 새 생명 주고 떠난 아들
“제 아들은 참 밝고 씩씩한 아이였습니다. 제 아들은 2006년 1월 하늘 나라로 떠났습니다. 아직도 아이를 떠올릴 때면 그리움에 사무쳐 가슴이 아픕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을 선물하고 떠난 착한 우리 아들, 생명을 살리는 숭고한 일을 하고 떠난 따뜻한 아이. 하지만 저는 가끔씩 ‘우리가 한 결정이 아들을 위한 일이었을까, 잘한 일이었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습니다. (중략)
사람들에게 잊혀질 때, 그때가 사람이 진짜 죽음을 맞이할 때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들이 오랫동안 기억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우리 아들이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그들의 마음속에서 영원히 살아가길 바랍니다. 여러분, 제 아들 학빈이가 우리 곁에서 오래도록 살아 있을 수 있도록 잊지 말아 주세요. 지금은 만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지만 우리 아이를 기억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마지막으로 제 아들을 통해 새 생명을 살게 된 이식인 여러분, 오래도록 건강하게 살아 주세요.”
낭독을 마치자 객석에 앉아 있던 강호 씨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강 씨는 13년 전 고등학교 1학년생이던 아들 강석민 군을 먼저 떠나 보냈다. 지난 2000년 3월 갓 고등학교에 들어간 석민 군은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며 즐거운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날 “엄마, 머리가 너무 아파”라는 말을 뱉은 후 갑자기 쓰러졌다. 석민 군의 병명은 ‘다발성 뇌출혈’이었다. 그리고 그는 뇌사 판정을 받았다.
강 씨는 “평소에 아주 건강했던 아이였기에 뇌사 상태라는 진단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3일 동안 그와 가족들은 쓰러져 있는 아들의 곁을 묵묵히 지켰다.
“아들이 쓰러진 지 3일째 접어들었을 때였어요. 하루하루를 그렇게 보내는 것을 아들이 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에게 아들을 먼저 보내는 슬픔은 컸지만, 그 슬픔에 사로잡힌 채 아들의 마지막을 그대로 흘려보내기에는 아들은 너무 젊었다. 그는 아들의 찬란한 젊음을 통해 누군가에게 새로운 생명을 줄 수 있다면 그것도 의미 있는 일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결국 그의 가족은 석민 군이 쓰러진 지 3일째 되는 날 아들의 장기, 조직, 시신 기증을 결정했다. 석민 군은 폐·심장·간·췌장·신장·각막 등을 기증해 8명의 환자들에게 선물을 주고 세상을 떠났다.
강 씨는 매년 3월이 되면 아들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사무친다. 단 한 번만이라도 아들의 손을 잡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행복하게 웃다 잠자리에 들고 싶은 게 그의 소원이다. 하지만 그는 이 세상에 없는 아들을 붙잡고 아파만 하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들이 자신에게 남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
이후 그는 근무 중인 해성국제컨벤션고등학교에서 ‘생명존중’ 강의를 진행하며 학생들에게 본인이 직접 겪은 생명나눔의 소중함을 전달하고 있다. 2010년 11월에는 서울·경기지역 고등학생 1천여 명이 모인 ‘생명사랑나눔+페스티벌’ 행사장에 나가 장기 이식의 필요성을 알리는 강연을 하기도 했다. 강 씨는 아들의 장기를 이식받은 이식인이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지 궁금할 때도 있다.
“세포기억 이론에 따르면 심장 이식을 받은 사람은 기증자의 감정이나 느낌을 심장을 통해 기억할 수 있다고 들었어요. 아직 확실하게 규명된 이론은 아니지만 정말 소설이나 드라마에서처럼 언젠가 석민이의 심장을 이식받은 사람이 저를 스쳐 지나갈 때는 가슴이 요동치지 않을까요?”
“새로운 삶에 감사하며 책임감도 무거워”
이날 행사에는 장기를 이식받아 건강을 되찾은 이식인들도 함께 참여했다. 신희상 씨는 지난해 간을 이식받았다. 그는 30대 중반에 B형간염 보균자임을 알게 됐다. 간염은 간경화로 진행됐고 그는 20여 년 동안 투병생활을 하며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으로 살았다. 지난해 서울대병원에 입원하면서부터는 마음속으로 죽음에 대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장기 이식 신청을 한 지 1년 만인 지난해 간 이식을 받게 됐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말 감격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안타까운 일로 인해 제게 새로운 생명을 주고 가신 분이 있기에 마냥 좋다고 기뻐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큰 기쁨을 드러내놓고 표현하기엔 어려운 게 제 입장입니다. 생명을 새로 받았다고 해서 좋아만 할 게 아니라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을 찾아 정말 열심히 하는 게 제게 생명을 주고 가신 분에 대한 예의인 것 같습니다.”
신 씨는 이식을 받은 후 삶에 대한 태도가 크게 바뀌었다고 했다. 소중한 생명을 통해 건강을 되찾은 만큼 이전보다 주변을 더 많이 돌아보게 되고 긍정적으로 삶에 임하게 됐다.
그는 “기증인의 가족들을 만난다고 생각하니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거웠다”며 “새로운 생명을 주고 간 분과 남겨진 가족들을 위해 매일 기도하고 있다”는 감사의 이야기를 전했다.
추모 연극에 이어 가수 양희은·지세희·투빅 노래 선물
이번 행사에선 장기기증을 주제로 한 연극 <선물>이 공연됐으며 가수 양희은, 지세희, 투빅이 노래를 선보였다. 행사의 사회를 맡은 아나운서 최윤영 씨는 “최근 장기기증에 대한 고민을 담은 드라마를 보며 장기기증에 관심이 많이 생겼다”면서 “어려운 결정을 하신 가족들을 위한 자리에 함께 참여하게 돼 개인적으로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날 행사를 마련한 질병관리본부 정한덕 장기기증지원과장은 “우리모두가 수혜자와 기증자 유가족 분들에게 감사하고 존경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새 생명을 살린 위대한 사랑을 실천한 데 대한 자긍심을 가졌으면 한다”고 전했다.
글·김혜민 기자 / 사진·지미연 기자 2013.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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