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대한상공회의소는 최근 직장인 500여 명을 상대로 조사한 ‘창조경제시대 기업문화 실태와 개선과제’ 결과를 발표했다. 구글이나 페이스북처럼 창의적인 기업문화를 가진 글로벌 기업을 100점으로 보고 우리의 기업문화를 평가했다. 조사 결과 우리 기업의 기업문화 점수는 평균 59.2점에 머물렀다. 응답자의 61.8퍼센트는 창조경제 실현을 가로막는 기업문화로 ‘상명하복의 경직된 의사소통 체계’를 꼽았다. ‘개인보다 조직 전체를 강조하는 분위기(45.3퍼센트)’ ‘부서 이기주의(36.7퍼센트)’ ‘지나친 단기 성과주의(30.7퍼센트)’ 등이 뒤를 이었다. 박종갑 대한상공회의소 상무는 “상명하복의 보수적인 문화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의사소통이 이뤄지는 개방적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의 ‘구글’이 탄생하려면 소통의 방식부터 바꿔야 한다는 얘기다. 소통의 방식이 변하려면 관계가 먼저 변해야 한다. 대하기 어려운 사람에게 말만 편하게 할 수는 없는 법이다. 상사가 고압적이면 부하 직원은 자연히 움츠려든다. 이런 관계에서 창의적 아이디어와 혁신을 기대하긴 어렵다. 반대로 관계가 편해지면 대화가 시작된다. 최근 많은 기업이 전통적인 호칭과 직책을 없애고 개방적 기업문화를 만들어보자고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제임스가 지난 회의 때 낸 아이디어는 어때?”
“난 앨리스 아이디어가 더 마음에 들었는데?”
외국계 기업이 언뜻 떠오르지만 순수 토종 IT기업의 회의 장면이다. 전 국민의 애플리케이션 ‘카카오톡’으로 잘 알려진 카카오다. 이 회사에 입사하면 누구든 영어 이름을 만들어야 한다.
직원들은 서로를 부를 때 이 영어 이름을 사용한다. 외국인 직원이 많은 것도, 사내 영어 공용화를 하는 것도 아니다. 수직적 조직 문화를 없애고 의사소통을 더 활발히 하자는 취지다. 아무래도 ‘철수’ ‘영희’보다는 영어 이름이 덜 어색하다.
임원진도 예외는 없다. 김범수 이사회 의장의 이름은 브라이언, 이석우 공동대표의 이름은 비노다. 이렇게 서로를 부르니 신입사원도 비노의 의견에 ‘노’라고 말할 수 있는 문화가 생겼다.
과장·대리를 과감히 던진 기업은 카카오뿐만 아니다. SK텔레콤은 팀장 이하 직원의 호칭을 매니저로 통일했다. 직위와 연공서열에 관계없이 자신의 업무 영역에서 전문지식과 책임을 가진 담당자라는 의미다.
홍보팀 허재영 팀장은 “직위의 부담스러움을 털고 각자 맡은 책임을 다하자는 취지”라며 “연차가 차면 실무보다 관리에 집중하려는 성향을 보이기 마련인데 매니저 호칭을 도입한 이후 고참 직원들의 태도가 달라졌다”고 말했다.
경영기획실 신재원 매니저는 “호칭을 통일한다고 위계질서가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매니저란 호칭을 쓰는 직원들끼리는 편해진 느낌”이라고 말했다. SK텔레콤이 이 제도를 도입한 것은 2007년. 선례가 그룹 내로 퍼지면서 지금은 대부분의 SK계열사가 매니저란 호칭을 쓴다.
CJ그룹은 2000년부터 모든 임직원의 직함을 없애고 이름 뒤에 ‘님’을 붙이는 호칭 파괴를 시작했다. 워낙 파격적인 시도라 시행 초기에는 부정적인 시선이 많았다. 홍보용 제스처가 아니냐는 비난이 있었고, 모두가 다 ‘님’이면 정상적인 조직 관리가 가능하냐는 의문도 있었다.

“친밀도 높아져 업무에 관한 토론 활성화”
현석 부장은 “‘님’ 호칭을 써 상사와 부하가 서로 존중하는 문화를 만들면 젊거나 직급이 낮은 사람의 생각도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말했다.
오래 못 갈 것이란 의견이 많았지만 13년이 지난 지금은 오히려 직급을 부르는 게 이상한 일이 됐다. 친근감 있는 직원들 사이에서는 성을 붙이지 않고 이름에만 ‘님’을 붙이기도 한다. 현부장은 “젊은 직원들의 사기가 높아진 것 같다”며 “예전에는 과장이나 부장이라고 하면 어려운 사람이란 느낌이 있었지만 지금은 친밀도가 높아져 토론이 활성화됐다”고 말했다.
포스코와 한화L&C도 사원 호칭을 없애고 매니저 제도를 도입했다. KT는 팀장 이하 전 직원을 ‘과장’이라고 부른다. 신입사원도 마찬가지다.
중소기업들도 예외는 아니다. 기업용 개인 단말기(PDA) 제조업체인 블루버드소프트는 리더와 매니저, 단 두 가지 호칭만 사용한다. 소통이 활성화되자 일반 사원의 아이디어가 채택되는 일이 많아졌다.
스팀청소기로 널리 알려진 한경희생활과학은 CJ처럼 대표부터 사원까지 직함 대신 이름 뒤에 ‘님’자를 붙여 부른다. 자율적이고 혁신적인 조직문화가 형성되면서 매출의 1퍼센트를 상금으로 지급하는 ‘아이디어 공모전’ 등에 참여하는 직원의 숫자가 크게 늘었다. 여행 전문업체 서원관광은 기사라는 호칭 대신 승무원이라고 부른다. 일에 대한 자부심을 부여하자는 취지다.
한국전력은 최근 유연한 기업문화를 구현하자는 취지로 ‘권위주의 타파 14계명’을 선정해 캠페인을 시작했다. ‘자신이 마실 차는 스스로 준비합시다’ ‘지나친 반말이나 하대(下待)를 하지 맙시다’와 같이 주로 부하 직원을 불편하게 만드는 상사의 행동과 관련된 것이 많다. 상사가 먼저 휴가를 사용하고, 회의를 할 때 상급자는 말을 줄이자는 내용도 담겼다.
이 14계명은 직원들의 아이디어를 모아 만들었다. 권위주의를 깨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주관식으로 물었더니 수천개의 의견이 쏟아졌다. 다른 기업들이 참고할 만한 내용이 많다.
호칭 하나 바꿨을 뿐인데 회의실 공기가 달라졌다. 이름 뒤에 ‘님’자를 붙여 부르는 전무님 덕분에 괜히 뿌듯한 기분이 든다.
손님을 맞이하는 부장은 자신이 직접 커피를 내왔다. 작은 실천이 우리 기업을 바꾸고 있다.
글·장원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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