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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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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모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다 보니 요즘 교정 곳곳에 특별히 눈길이 많이 간다. 그 모든 것들이 나를 만들어 준 것들이라 생각하니 그냥 지나쳐지지 않아서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족패천하(足覇天下)탑’. 이 탑은 특별한 장식도 없이 그저 담백하고 소박하다. 아니 확 털어놓고 말하자면 고등학교 신입생 때 처음 보자마자 이렇게 중얼거렸던 기억이 난다. “어, 탑이 뭐 이래?”

탑은 너무도 평범했다. 게다가 본관 앞의 근사한 정원수들이 가득한 틈 속에 그냥 놓여 있었다. 그 옆의 주목이 엄청나게 비싸다느니, 그 뒤의 미루나무는 환갑이 넘으셨다느니 하는 찬사들이 쏟아지는 정원에 그냥 그렇게 덩그러니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 탑의 의미는 그야말로 대단했다. 바로 1947년 제51회 보스턴 마라톤대회에서 세계신기록으로 우승한 서윤복 동문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탑이었기 때문이다. 백범 김구 선생께서 광복 후 처음으로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세계를 제패한 쾌거라고 감격하면서 ‘족, 패, 천, 하’ 네 글자의 휘호를 직접 써주셨다는 역사적 사실이 담긴 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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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과 사실이 동시에 가능하다는 것을 처음 깨닫게 해 준 탑이다.

일제 강점기를 겪으며 감수해야 했던 온갖 비극들.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에서 민족의 설움을 딛고 세계를 제패하여 우리 민족의 가슴을 후련하게 해 주었지만 가슴에는 일장기가 붙어 있었다. 그런데 자랑스러운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처음으로 세계를 제패한 젊은이가 얼마나 대견하셨을까. 평생을 풍찬노숙하면서 조국 광복을 염원했던 독립투사의 벅찬 감격을 짐작해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숙연해진다. 족패천하탑은 학교를 넘어 우리나라의 보물로서도 족하다. 소박하고 단순한 외양은 뚝심과 항심을 떠올린다. 신진과 원로의 열정과 비원이 하나로 만나 땀과 피를 느끼게 한다. 이는 누구를 짓밟고 이기는 승리가 아니라 과거와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진정한 승리로 자신을 이김으로써 보여주는 영혼의 정수다.

책상에서 탁상공론을 일삼으며 세계를 제패한답시고 나대지도 말라. 한결같이, 아니 더욱 치열하게 삶의 현장에 충실해라. 누가 뭐래도 언제나 현장에 있어야 하며, 바로 그 현장에서 부단히 실천하고 함께 기뻐해라. 겸손하게 두 발로 현장을 끊임없이 누벼야 한다. 그러면 천하를 품고 싶은 이들을 모두 품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족패천하탑은 떠꺼머리 고등학생의 눈에는 우습게 보였으나 모교에 돌아와 교사로 재직하면서 점점 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족패천하의 진정한 뜻을 더욱 다듬고 새길 수 있게 하는 것이 우리의 교육이라는 생각까지 드는 요즘이다. 우습게 보이던 것들, 삶의 구체적 현장에서 벗어난 채 교언영색(巧言令色 : 아첨하는 말과 알랑거리는 태도)하는 태도를 버리는 것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교육의 첫걸음이다. 그럴 때 자신이 그동안 갇혀 있었던 틀을 깨고 나올 수 있음을 깨닫게 하는 것, 이는 인간의 바람직한 성장을 도모하는 교육의 영원한 첫걸음이다.

오늘도 족패천하의 뜻을 좀 더 새겨보려 한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뜨겁게 생각하고 치열하게 실천하라고 가르쳐야겠다. 모든 학교들이 가슴이 따뜻한 진정한 인재를 키우는 학교, 진정한 명문을 함께 꿈꾸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우리 교육을 바로 세우는 궁극의 발걸음이다. 족패천하!

글·허병두(숭문고 교사·책따세 공동대표) 2014.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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