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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나에게 책은 OO이다 “학생들에게 문학으로 휴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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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득한 날에 / 하늘이 처음 열리고 / …(중략)…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4월 15일 정오 서울 마포구 대흥동 숭문고등학교 도서관. 한 쪽 편에 모여 앉은 4~5명의 학생 중 한 명이 육사의 시 ‘광야’를 낭송한다. 책을 보는 것도 아니다. 외워서 읊으며 친구들에게 들려준다. 그 무리 가운데서 한 교사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학생들을 바라본다. 숭문고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허병두(53) 교사다.

이 학교 학생들은 졸업할 때 최소한 10개 정도의 시를 외운다.

허 교사의 극성 때문이다. 허 교사는 치열한 입시 경쟁에 지친 학생들에게 문학을 통해 휴식을 줘야 한다고 믿는다. 시를 외우면서 느끼는 감성의 폭도 넓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학생들은 그를 한국판 ‘키팅 선생님’이라 부른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 등장하는 엄격한 기숙학교에서 도제식 교육의 틀을 깨고 학생들에게 문학을 통한 감성적 삶을 일깨워 준 영어 교사 키팅선생님 같아서다.

허 교사가 학생들에게 외우도록 하는 첫번째 시는 이육사의 ‘광야’이다. 그 이유는 이렇다. “광야라는 곳이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지만, 시대적 상황을 떠나면 무한 공간일 수 있다. 무한 공간은 무한 시간, 그리고 무한 자유다. 학생들이 광야의 의미를 깨닫고 꿈을 향해 자유를 느끼며 당당하고 의연하게 나아갔으면 하는 바람에서 ‘광야’를 추천한다.”

허 교사는 단순히 시를 외우는 등 문학을 접하도록 하는 것만으로 학생들에게 삶의 휴식을 주려고 하지 않는다. 책을 쉽게 접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기 위한 노력도 기울였다. 도서관 건립이 그것이다.

1987년부터 교직 생활을 시작한 허 교사는 모교인 숭문고로 오면서 도서관 건립에 심혈을 기울였다. 책을 통해 학생들이 꿈을 키워 나갈 수 있다는 믿음에서였다. 그는 “학생들에게 책과 함께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고 싶었다”며 “당시 창고 수준이었던 도서관을 변모시키기 위해 많은 선후배들의 노력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 같은 허 교사의 열정으로 현재 숭문고 도서관은 학교의 ‘자랑거리’가 됐다. 8개의 교실을 합친 널찍한 공간에 문학·역사·사회과학 등 각 분야 장서 2만여 권이 비치된 멀티미디어관으로 거듭났다. 학생들이 스스로 관리·운영하는 ‘자율형 운영시스템’도 정착돼 있다. 이는 전국 학교도서관 리모델링 정책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학생들의 문학적 감성을 넓히려는 허 교사의 또 다른 독특한 교육 방식은 ‘책 쓰기’이다. 그는 학생들에게 ‘자신만의 책’을 쓰게 하는 교육을 지속적으로 해 왔다. 학생 각자가 자신이 원하는 주제를 찾아 책을 쓰는 방식이다. 그는 “공부에 관심이 없던 학생이이 수업을 통해 ‘꿈’을 찾게 된 경우도 있었다”며 “꿈이 없어 고민하는 아이들에게 ‘너희가 가장 좋아하는 한 권의 책을 발견하면 그때 너희들이 가야 할 길을 알 수 있다’고 말해 주는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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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장벽 없이 책 읽게 하자” 저작권 기부운동 펼쳐

허 교사는 요즘 저작권 기부운동에 힘을 쏟고 있다. 1998년부터 그가 대표를 맡고 있는 ‘책따세(책으로 따뜻한 세상 만드는 교사들)’가 중심이다. 책따세는 허 교사처럼 독서 교육의 중요성에 뜻을 같이하는 현직 중·고교 국어 교사와 사서 교사들이 만든 모임이다. 80여 명의 회원 중 매주 열리는 회의에 참석하는 인원만 30여 명에 달한다. 이 단체의 저작권 기부운동은 한 제자의 물음이 계기였다. 그의 설명이 이어졌다. “책따세는 정기적으로 추천도서 목록을 발표하는데 제자 중 한 명이 ‘선생님, 이 목록에 있는 책들 중 한 권만 사야 한다면 뭘 사는 게 좋을까요?’라고 물었어요.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한 권만 골라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머리가 멍했어요. 저희가 목록을 만든 까닭은 아이들이 책을 통해 변화되길 바랐기 때문인데, 책을 살 수 없는 아이들은 그럴 기회를 가질 수 없는 거잖아요. 그래서 누구나 아무 장벽 없이 책을 읽을 수 있게 하자고 생각했죠. 전자책이 떠올랐어요. 이를 위한 가장 기초적인 작업이 저작권 기부운동이었죠.”

허 교사와 책따세 회원들은 이후부터 저작권 기부운동을 펼쳤다. 해당 저자와 출판사를 찾아가 동의를 구하고, 인터넷을 통해 무료로 책을 볼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바람의 딸>로 유명한 한비야 씨를 비롯한 90여 명의 작가들이 저작권 기부운동에 동참했다. 허 교사는 “많은 저자들이 흔쾌히 동의해 줬다”며 “그들의 기부 덕분에 청소년들과 해외 동포들이 좋은 책을 자유롭게 읽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허 교사의 저작권 기부운동은 다양하게 발전하고 있다. 초창기 유명 저자들의 기부로 시작해 점차 학생들의 참여가 늘고 있는 것이다. 실제 2012년 6월 17일에는 허 교사와 제자들이 국내 최초로 학생과 교사가 함께 집필한 책 <낙서열전(낙 없고 서럽고 열 받는 전국의 중·고딩을 위한 낙서책)> 1·2권의 저작권을 한국저작권위원회에 기증하기도 했다.

책따세도 그 해 한국저작권위원회와 저작권 나눔 확산 및 공유저작물 이용 활성화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업무협약을 맺었다. 저작권 기부운동의 캐치프레이즈인 ‘지식의 나눔과 사랑의 더함’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셈이다. 그는 “학생들이 쓴 글이나 직접 찍은 사진, 동영상, 일러스트 등을 저작권 기부 사이트에 올리는 건수가 늘어나고 있다”며 “이 운동의 목적에 부합하는 형태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유치원생들이 그린 그림도 저작권을 인정받을 수 있다”면서 “자신이 올린 저작물이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활용된다면 얼마나 유익한 일이겠느냐”며 누구나 자유롭게 책을 읽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글·최재필 기자 2014.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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