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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칠곡군에 인문학이 활짝 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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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역, 니은, 디귿, 리을… 가, 갸, 거, 겨, 고, 교, 구, 규….”

또박또박 한글 외는 소리로 가득 찬 경북 칠곡군 가산면의 작은 마을회관. 하얗게 센 머리를 곱게 빗어 넘긴 열 명의 할머니들이 목청을 높이고 있다. 얇은 공책에 한 글자 한 글자를 꾹꾹 눌러쓴다. 6학년 1반부터 8학년 9반까지의 학생들은 가산면을 오랜 시간 지켜온 할머니들이다.

박태화(74) 할머니는 들뜬 목소리로 자랑했다. “바깥양반한테 글 공부한다고 하기 부끄러워서 몰래 숙제하느라 애 많이 먹었지. 인자사(이제야) 은행 가서 볼 일도 보고, 간판도 읽고 하는 거 보면 고맙고 신기한기라~.”

칠곡군 동명면 마을잔치. 15세 손자는 할머니 박후불(71)씨가 정성스레 적은 편지를 낭랑한 목소리로 읽어 내려간다.

“사랑했던 순애아빠. 개밥을 챙겨주고, 피곤에 지쳐 씹는 둥 마는 둥 밥도 팽개치고 책가방 들고 한글 공부 배우러 갑니다. 3년을 열심히 배우고 쓰고 밤이면 달력 뒤편에다 글씨 연습을 합니다. 너무 재미있고 선생이 고마워 죽겠어요. 순애 아빠요, 내 행복을 아시겠지요.”

손자는 울먹울먹하더니 이내 눈물 한 방울을 툭 하고 떨어뜨렸다. 할머니가 글을 배우고서 돌아가신 할아버지에게 처음으로 쓴 편지였다.

‘인문학마을’로 불리는 경상북도 칠곡군에서 볼 수 있는 광경들이다. 한적한 농촌지역이었던 칠곡군은 10여 년간의 인문학 조성사업으로 새로운 기적을 일궈냈다. 칠곡군의 변화는 올해 12월 17일 한국국학진흥원이 주최한 ‘제6회 행복한 대한민국을 향한 인문정신문화포럼’에서 지역밀착형 인문학 운동의 우수 사례로 선정되며 주목받았다. 칠곡군 교육문화회관 평생교육담당 지선영 계장은 “10여 년 전부터 칠곡주민이 만들어낸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말했다.

2000년부터 칠곡군 자치사업으로 시작한 칠곡군 주민의 평생학습은 2013년 현재 ‘마을로 찾아가는 현장교육’만 50강좌, 청소년과 어른을 위한 인문학과 평생학습까지 모두 150여 개에 이르는 강좌를 운영하고 있다. 2004년 9월 평생학습도시로 선정된 이후 칠곡군은 2005년 국내 최초로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하는 학점은행제 대학인 ‘칠곡평생학습대학’을 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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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10개소에서 인문학사업… ‘인문학도시’로 도약 꿈꿔

3언제 어디서나 학습을 받을 수 있다는 취지로 학점을 통장처럼 모아서 학위를 취득할 수 있게 한 제도다. 농사를 짓는 어르신들을 위해 농업경영전공 수업을 시작으로 사회복지, 아동학, 청년복지학, 외국어로서의 한국어 등 네 개의 전공수업을 개설했다. 지금까지 289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올해 칠곡군은 마을 10개소에서 인문학사업을 육성하며 인문학도시로의 확장을 꿈꾸고 있다. ‘칠곡 미래구상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마을리더 교육을 6개월간 실시했으며 ‘생각밥상’이라는 주민주도형 인문학 사업토론 등을 한다.

인문학마을 사업은 마을 협의체를 만들고 마을별 신문기자도 육성하고 있다. 2013년 10월 마을 인문학 월간 신문인 <두루두루>가 첫 발간됐다. 10개 마을 주민 기자단으로 이뤄져 마을의 인문학 행사소식을 전하고 있다. 같은 시기 인문학과 함께 엮어 칠곡마을 이야기를 풀어나간 책 <칠곡, 사람을 만나다>와 <칠곡, 인문학 고수를 만나다>도 발간했다.

칠곡군 인문학도시 창조 지역사업 중 하나인 ‘칠곡 인문학 스토리텔링-구술사 아카데미’의 결과물이다. 각각 일반인과 청소년 기자들이 지역민들을 인터뷰해 만든 것이다. 칠곡 미군부대와 6·25전쟁을 겪은 지역민들의 육성을 담았다.

<칠곡, 사람을 만나다>에 참여했던 주석희(43) 씨는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아픈 전쟁의 역사를 어르신들의 목소리로 듣고 나니 아이들에게 해 주고 싶은 얘기가 많아졌다”며 남다른 감회를 드러냈다.

인문학교육으로 마을마다 활기가 돌고 있다. 금남리부녀회는 일주일에 한두 번 어르신들이 한글을 배우는 날에 간식을 챙겨드린다. 또 ‘비누 만들기’와 같은 생활강좌도 같이 마련해 생필품을 만들기도 한다. 이제 어르신들은 마당에 설치된 스크린 앞에 옹기종기 모여 영화를 보고, 인근 학교에 가서는 아이들과 함께 책을 읽는다.

금남리부녀회장 신상자(57) 씨는 “우리 마을에서는 인문학의 힘을 느낄 수 있다”면서 “세대간 가족간의 치유가 이뤄지고 감동을 가진 마을이 되었다”며 감격스러워했다.

칠곡군은 앞으로 인문학도시로의 도약에 박차를 가할 계획이다. 지선영 계장은 “인문학의 중심은 사람, 마을 공동체를 이롭게 하는 것”이라며 “주민들이 만든 인문학마을이 도시로 확장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글·박지현 기자 2013.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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