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연암 박지원이 읊었다. 선친이 그리울 때는 형의 얼굴을 보고, 형이 그리울 때는 제 얼굴을 냇물에 비춰 본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는, 형과 아우 사이는 그런 것이다.
설날. 7남매 가운데 아들 3형제는 권속을 거느리고 나주의 고향집에 모인다. 이제 우리 아버지는 그곳에 계시지 않는다. 오는 6월이 되면 어느새 7년이 된다. 어머니 혼자 아버지를 그리며 사신다. “무정한 영감. 어째서 꿈에 한 번 제대로 나타나 보지도 않는 것이여” 하고 원망하면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정들 시간도 없이 자식들을 낳고 기르셨다. 자식들과도 정들 시간이 없이 사셨다. 그러니 정을 나눌 시간은 당연히 없었을 것이다. 맏이인 나와는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자식이 무엇인지도 모를 때 나를 낳았다니까. 그리고 나는 늘 동생들보다 의젓해야 했으니까.
아버지는 읍 소재지에서 양복점을 하셨고, 어머니는 면의 산골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농사를 지으셨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거리는 30리 길. 당연히 나는 아버지 얼굴을 한 달에 한 번쯤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아버지와 친해질 기회가 없었다는 뜻이다.
고등학교 때부터는 도시로 나가 생활했으니, 친해질 기회가 영영 없어져 버린 것이다. 대학 3학년 때 군에 입대할 때까지도 그랬다.
그런데 참 이상한 변화가 내게 일어났다. 전주에 있는 부대로 배치받고 나니 한 달도 못 돼서 설날이 다가왔다. 집이 그리웠다.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내내 객지에서 다닐 때도 집이 그리운 적이 별로 없었다. 외로움은 육체적·정신적 고통 속에서 심하게 느끼게 되는 것 같았다.
1주일에 한 번쯤 단체로 곤욕을 당하고, 낮이면 젖은 탄재 통을 들고 뛰어야 했고, 밤마다 세 시간씩 내무반 동초와 보초를 서야 했다. 지친 몸으로 매트리스에 누우면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설날이나 돼야 집에서 며칠씩 지내시던 아버지 생각, 섣달 그믐날에도 밀린 일을 해낸 뒤에야 밤길을 걷고 걸어 돌아오시던 아버지. 때로는 점심 때가 다 돼서야 돌아오시는 바람에 차례에도 참석하지 못하시던 아버지가 몹시 그리웠다. 그 시절에는 겨울 밤이 왜 그리 춥기까지 했던지.
군대에서 열흘을 그렇게 지내다 보니 나는 사람꼴이 아니었다. 밥까지 거의 먹지 못하고 보니 그야말로 중병 환자였다. 오죽했으면 부대장이 집에 가서 쉬고 오라면서, 첫 휴가도 다녀오지 않은 내게 2박3일의 ‘출장증’을 끊어 줬을까?
나는 집으로 가면서도 연락을 하지 못했다. 시외전화를 하려면 일부러 전화국을 찾아가야 하던 시절이었다. 마음이 바쁘기도 했지만, 그냥 가서 식구들을 놀라게 해도 더욱 큰 기쁨이 될 듯싶었다. 그날이 바로 설날이기도 했다.
전주에서 광주까지, 거기서 다시 고향 나주까지 버스를 타고 갔다. 그리고 정류장에서 집을 향해 달렸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집 대문이 잠겨 있었다. 아무리 두드려도 안에서는 소식이 없었다.
앞집으로 뒷집으로 다니면서 사정을 알아본 뒤에야 그 사정을 알 수 있었다. 식구들 모두 나를 면회할 양으로 전주로 갔다는 것이었다.
글·이상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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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