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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열정과 끼, 원대한 포부 가지고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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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명동 한복판에 있는 눈스퀘어의 5층 패션몰 레벨5에는 독특한 매장이 하나 있다. 198m² 크기의 매장에 국내 신진디자이너 80여 명이 모여 만든 의류·액세서리점 ‘랩5’다. 이 매장은 젊은 디자이너들이 독립 브랜드로 옷을 디자인하고 판매하는 공간이다. 임차료를 아예 받지 않기 때문에 창업부담이 거의 없다. 판매액의 일부만 수수료로 내면 된다. 대한민국 패션대상 대통령상 수상자인 안태욱 씨, 프랑스 디나르 국제 디자이너 페스티벌 대상 수상자인 이재환 씨 등 젊은 실력가들이 랩5에 참여했다.

젊은 디자이너들을 후원하는 사람은 패션몰 레벨5의 이호규(50) 대표다. 그는 부동산 컨설팅 자문회사인 KAA, BHP코리아의 창립 멤버이자 영국계 부동산 컨설팅업체인 세빌스코리아 회장을 지냈다. 그는 세빌스코리아 회장 시절 눈스퀘어를 개발하고 관리하면서 한국형 패션 브랜드를 고안해냈다.

눈스퀘어에는 레벨5와 함께 스웨덴의 H&M, 스페인의 자라·망고 등 글로벌 패션브랜드가 입점해 있다. 이 대표는 “패션쇼핑몰을 개발하면서 한국 하면 단번에 떠오르는 패션 브랜드가 없다는 게 늘 아쉬웠다”며 “그래서 2009년 패션몰 레벨5에 대주주로 참여했다가 아예 경영까지 맡게 됐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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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을 시작하며 그는 20여 년 가까이 쌓아온 투자 컨설팅 노하우를 패션사업에 접목했다. 디자이너가 제품 생산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매장 운영이나 제품 유통을 돕는 일이다. 특히 실력 있는 디자이너를 많이 끌어 모으기 위해 임대료를 받지 않는 파격적 선택을 했다. 젊은 디자이너를 후원하고 육성하는 인큐베이터 공간을 마련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랩5에 참여하는 디자이너의 자격요건은 뭘까? 이 대표는 “열정과 재능만 있으면 된다”고 말한다. “디자이너는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옷만 잘 만들면 됩니다. 소비자의 니즈를 잘 파악해 자신만의 브랜드를 찾는 일이죠. 제품 판매와 마케팅은 제가 도와줄 자신이 있습니다.”

2011년 랩5에 입점한 지용구(31) 디자이너는 “랩5가 디자이너로 독립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고 말했다. 2008년 서경대 패션디자인학과를 졸업한 그는 당초 무대의상 디자이너로 일했다.

남성복 디자이너가 꿈이었지만 그 일에 뛰어들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디자이너가 자신의 브랜드를 론칭하려면 많은 자금이 필요하다. 적어도 23가지의 의상을 만들고 카탈로그를 촬영해야 한다. 또 세 시즌 정도는 매번 의상을 제작해야 한다. 여기에 쇼룸과 매장까지 열려면 수천만 원의 비용이 들어간다. 지 디자이너는 무대의상으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브랜드 론칭에 대한 꿈을 버릴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 랩5를 알게 돼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게 됐다. 이곳에서 그는 남성복 브랜드 지플리시(Zplish)를 선보였다.

“한 달 가까이 랩5 매장 입구에 전시해줍니다. 옷 진열뿐 아니라 브랜드 컨셉트에 맞게 공간을 꾸며주기도 해요. 아이디어만 제시하면 랩5 MD(상품기획자)와 마케팅 담당자들이 무료로 제작해 설치해줍니다. 이때 브랜드가 알려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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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파리에서 유학한 김인혜(33) 디자이너는 2012년 초 랩5에 참여했다. 파리에서 10년 가까이 공부한 그는 한국에 진출을 하는 데 애를 먹었다. 1년 가까이 국내 유명 편집숍을 전전했다.

상당수가 그의 디자인 감각보다 경력을 따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과감히 브랜드를 만들어 론칭하기엔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그의 디자인이 국내 소비자와 소통할 수 있을지 시험해볼 무대가 먼저 필요했다. 오랜 고민 끝에 그가 선택한 곳이 랩5다.

그런 결정을 한 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랩5 MD의 영향이 컸다. 유일하게 그가 만든 옷으로만 디자인을 평가했다. 둘째는 상권이 좋아서다. 유동인구가 많은 명동에 있기 때문에 소비자와 만날 기회가 많다. 셋째는 디자이너를 지원하는 체계적 시스템을 갖췄다는 점이다. 브랜드 컨셉트에 맞게 홍보와 마케팅을 지원하는 것은 기본이고 독립 브랜드로 단독 매장을 열 수도 있다. 비(be)와 율앤미(yul&me)는 랩5에 입점했다 이름이 알려지면서 단독 매장으로 독립한 경우다.

김 디자이너는 자신의 프랑스 이름을 딴 메종드이네스(MAISON DE INES)를 론칭했다. 시장 반응이 기대 이상으로 좋아 지난해에는 창덕궁 인근에 쇼룸과 매장도 열었다. 김 디자이너는 “랩5 입점을 기회로 꿈을 하나씩 실현하고 있다”며 “신진 디자이너에게는 랩5가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준다”고 말했다.

이호규 대표가 패션사업을 하겠다고 할 때 주변에서는 말리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무엇보다 부동산과 패션은 전혀 다른 사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대표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한국 패션산업의 경쟁력을 믿었기 때문이다.

“국내 디자이너의 실력과 도전정신은 대단합니다. 해외를 다녀봐도 품질 면에서 외국 브랜드보다 훨씬 낫거든요. 유통구조와 마케팅만 해결한다면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사업 초반 레벨5는 임대료를 받지 않아 늘 적자였다. 그래서 주변에선 이 대표를 향해 ‘자선사업가’라는 조롱 섞인 말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4년이 지난 요즘 레벨5는 눈스퀘어 1·2층에 자리 잡은 ‘자라’ 매장의 매출을 따라잡았다. 이 대표가 후원한 디자이너들이 점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최근엔 레벨5 디자이너 브랜드가 백화점에 입점하는 일도 생겨났다. 지난해 11월 기준 레벨5에 등록한 소비자회원은 10만 명에 이른다.

이 대표는 “신진 디자이너를 후원한다기보다 파트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젊은 디자이너들이 잘되면 저절로 레벨5도 성장하기 때문이죠. 앞으로 국내 유망 디자이너의 해외 진출도 도울 계획입니다. 올해에는 국내에 레벨5의 2호점도 오픈할 예정입니다. 10년쯤 후 레벨5가 세계적 브랜드가 될지 누가 압니까.”

글·염지현 포브스코리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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