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축구공이나 차던 아들놈이 꽤 많은 위인전 전집과 SF소설 전집을 연달아 읽어 내자 어머니는 일대 용단을 내렸다. 여전히 생생하다. 멀찌감치서 그냥 쳐다보기만 해도 온 세상의 지혜를 나에게 다줄 것 같던, 흑갈색 두꺼운 표지 위에 작가와 책 이름이 금박으로 빛나던 세계문학전집 60권이 작은방 서랍장에 자리 잡던 그 풍경 말이다.
결과야 뻔하다. 온갖 ‘~스키’들 사이에서 방황하던 아들은 책장을 닫아 버렸고, ‘책 좋아하는 아들’ 이미지 구축에 실패한 어머니는 말문을 닫아 버렸다. 왕년에, 그러니까 누구에게나 한번쯤은 다 있었다는 그 ‘왕년’의 구성요소 가운데 하나는 아마 ‘문학 앓이’일 것이다. 다들 이런저런 추억 떠오를 법하다.
<속물 교양의 탄생>은 이러한 추억에 대한 얘긴데, 격이 다르다.
저자는 그걸 다 읽어 냈단다. 그것도 다양한 종류를 여러 차례에 걸쳐. (짝짝짝) 일단 박수부터. 그런데 서문에다 엉뚱한 소리를 해 놨다. “교양은 과시하거나 소장하는 것이 아니라 키워 내고 품어 내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책을 통해 사람과 사회를 만나야 한다고 이야기하기가 이렇게 어려웠나”고 토로하더니 마침내 “명작에 대한 편집증적 독서를 반성한다”고 해 놨다. 왜 그랬을까.
솔직히 책 자체가 놀랍다고 하긴 어렵다.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다는 징표 가운데 하나가 기원 찾기다. 먹고살기 바쁠 때야 그런 호사 누릴 여유 따윈 없다. 어느 정도 자리를 잡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난 어디서 와서 어디쯤 와 있고 또 어디로 갈 것인지 두리번거리기 시작한다. 이 책도 그런 종류다. 한국의 특수성이라면, 기원은 기원이되 식민지적 기원이라는 점이다.
한국 근대성의 식민지적 기원이라면 이미 어느 정도 예견된 틀이 있다. 일본 제국주의를 통해 매개되는 방식으로 수입되다 보니 원전의 참뜻이 그나마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고,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우리만의 전통적인 그 무엇에 대한 향수를 더더욱 강력하게 피력하는 것이다.
이 책도 그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프랑스의 정치사회적 모순이 가득 담긴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이 일제강점기 조선에서는 장발장의 파란만장한 인생담으로 받아들여졌다는 대목에서부터 시작해 결국 바람직한 대안으로 민중적 춘향전의 가능성을 언급하는 것으로 마무리짓는 방식 말이다.
물론 그 사이에 빼곡하게 들어찬 식민지 시기 문학의, 교양의, 지성의 풍경들은 읽는 재미를 더하게 해 준다. 그것도 비교적 귀에 익은 소설가, 시인 같은 문인들이 줄줄이 등장하니 말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조금 더 다른 얘기 하나 하고 싶다. ‘속물’이란 표현, 굉장히 조심스럽게 써야 한다. 저자야 자기고백적인 의미에서 썼겠지만, 아마 이 단어만 보고도 속이 뜨끔할 사람이 수두룩할 것이며, 각 일간지 서평 담당 기자들이 이 책에 대한 소개기사를 많이들 써 낸 까닭도 아마 거기에 있을 것이다.

이걸 뒤집어 보면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혹시 ‘속물적’이란, 그냥 ‘인간적’이란 뜻 아닐까. 그러니까, 아니었으면 하고 바랄지는 몰라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욕망, 가끔은 은근히 충족되면 괜스레 뿌듯하니 기분이 좋다가도 가끔 너무 노골적으로 들키면 발가벗겨진 채 길거리에 나앉은 듯 부끄러운 그런 욕망 말이다. 식민지기 교양에서부터 오늘날 인문학 열풍까지 비슷비슷한 현상이 늘 지속된다면 더더욱 말이다.
이렇게 본다면 반성한다는 이 책도 정작 또 다른 속물과 교양인의 경계 짓기로 읽힐 가능성은 없을까. 아주 졸렬하게 표현하자면 “너희들은 참 뻔한 책을 읽는구나, 나는 나만의 책을 읽는데”라는 중얼거림으로 읽히지는 않을까 하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교양이든 무엇이든 취향이란 건 원래 좀 자기만족적인 것 아니던가. 아니 빙빙 에둘러 말고 직설적으로 말해 두자. 속물? 진보적이라는 사람들이 정치적 패배를 견뎌 내기 위해 흔히 취하는 방어적 수사 같아서 개인적으론 퍽 불편하다.
글·조태성 (서울신문 문화부 출판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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