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세종 때의 문신인 이변 (李邊·1391~1473)은 크게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당시 김하와 더불어 조선의 외교 및 통역제도에 깊은 영향을 남긴 데다가 이순신의 직계 조상이라는 점에서 그 이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변은 1391년(공양왕3년) 고려 말 사재시 판사를 지낸 이공진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선이 개국되기 1년 전이다. 그는 세종1년(1419년) 남들보다 많이 늦은 29세에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 박사가 되었다.
<국조인물고>에 따르면 그의 성품은 지나칠 정도로 곧았다고 한다. “사람됨이 정직하여 이중적인 간격이 없이 겉과 속이 한결같았다. 사람의 과실을 보면 문득 면전에서 힐책하였다. 이조참의가 되어 매양 인사의 전형(銓衡)을 할 때는 윗사람이 하는 것을 많이 공박하였다.”
이변은 중국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담당하는 승문원에서 뛰어난 중국어 솜씨로 명성을 얻었다. 세종은 이런 이변을 총애했다. 세종은 원래 중인 신분의 역관이 담당하던 통사(通事·동시통역사)의 일을 문신들에게 맡겼다. 국가의 중대사를 처리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신분에 구애되지 않고 우수한 인재에게 맡겨야 한다는 신념에서였다.
세종16년(1434) 2월 1일 승문원 첨지사 이변은 이조정랑 김하와 함께 조선초 사역원 설립의 1등공신인 설장수가 지은 중국어 입문서 <직해소학>을 요동의 어학전문가에게 평가를 받기 위해 요동을 방문한다. 그런데 이를 전하는 실록에 흥미로운 내용이 나온다.

“이변은 그 사람됨이 본래 아둔하였는데 나이 30이 넘어서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에 들어가 한어를 배웠다. 목표를 정한 뒤에는 밤을 새워가며 강독하고 한어를 잘한다는 자가 있다는 말만 들으면 반드시 그를 찾아가 질문해 바로잡았다. 이로 말미암아 한어에 능통하게 되었다.”
김하는 유연했고 이변은 깐깐했다. 그래서 세종은 김하에게는 외교실무를 맡겼고 이변에게는 통사교육을 맡겼다. 분담이었다. 이후 6조의 참의를 두루 거친 이변은 세종31년(1449) 참판급에 오르고 계유정난 직후 형조판서에 오른다. 이 점을 보면 이변은 수양대군을 적극 돕지는 않고 방조하는 입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이변은 훈구의 일원이 되어 탄탄대로를 달리게 된다.
특히 세조 때에는 공조판서를 거쳐 중추원으로 물러나 중추원지사, 판사, 영사까지 지낸다. 정치적 위기를 잘 넘기고 크게 출세한 인물이 된 것이다.
이변에게는 이효조, 이효종 두 아들이 있었다. 그 중 이효조의 아들 이거(李据)가 이순신의 증조할아버지다. 이거에 대해 실록은 “성품이 강직하여 언관으로 있으면서 부정한 관리에 대해서는 직위고하를 가리지 않고 탄핵하였다”고 평하고 있다.
이순신의 조부 이백록도 벼슬에 나아갔지만 사화를 당해 고초를 겪었고 그 때문에 아버지 이정은 벼슬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4형제의 이름에는 정치에 대한 꿈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이희신(李羲臣), 이요신(李堯臣), 이순신(李舜臣), 이우신(李禹臣). 중국 고대의 제왕 복희, 요임금, 순임금, 우임금을 받드는 신하처럼 살라는 뜻을 읽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글·이한우 (조선일보 기획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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