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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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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우리에게 어릴 때부터 ‘오성과 한음’ 이야기로 유명한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1561~1613)은 실제로도 탁월한 경세가였다.

그는 조선 초 최대 명문가였던 광주 이씨로 연산군 때 화를 당한 이극균의 후손이다. 스무 살이던 1580년 문과에 급제한 이덕형은 이이 등의 주목을 끌며 승승장구했고 동인의 수장이던 이산해의 딸과 혼인했다. 벼슬살이의 출발부터 서인과 동인의 지지 속에 성장한 것이다. 그 때문인지 이덕형은 대체적으로 동인, 그리고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분화되었을 때는 양측 모두와 교류했고 심지어 서인의 이항복과도 긴밀한 우정을 유지했다. 아주 드물게 당파에 구속되지 않은 인물이었던 셈이다.

그는 이재(吏才)뿐만 아니라 문재(文才)도 뛰어나 서른한 살 때 예조참판을 거쳐 대제학에 이른다. 이는 그의 학덕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그리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임진왜란은 그에게 시련이자 동시에 기회였다. 전쟁 초기 일본과의 협상에서 실패를 겪기도 했지만 이후 선조를 가까이에서 보필하며 한반도를 덮친 전화(戰禍)를 다스리는 데 큰 기여를 하면서 벼슬도 끝 모르게 오른다. 불과 서른세 살 때인 1593년에 병조판서에 오르고 이듬해에는 이조판서를 역임한다. 그의 이재가 맘껏 발휘되는 시절이었다. 1598년 서른여덟 살의 이덕형은 우의정에 올라 ‘30대 정승’이 된다.

전쟁이 끝났을 때 이런 말이 있었다. “이(李)씨 성을 가진 세 분의 정승이 임금을 좌우에서 돕고 인도하여 오늘이 있게 되었다.” 오리 이원익, 오성 이항복, 그리고 한음 이덕형이 바로 그 세 정승이다.

전쟁이 끝나자 이덕형은 경상·전라·충청·강원도 4도 도체찰사가 되어 전후복구에 힘쓰고 1601년 영의정에 오른다. 선조는 이덕형을 알아주었고 이덕형은 헌신적으로 임금을 모셨다. 그 때문에 당쟁이 격화된 선조 시기를 지나면서 이덕형은 당쟁에 앞장서지 않고서도 최고위직인 영의정에 오를 수 있었다.

이런 이덕형에게도 광해군의 집권과 더불어 시련이 찾아온다. 광해군은 북인 중에서도 이덕형의 장인 이산해가 이끌던 대북파의 도움으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이덕형의 앞길도 탄탄한 듯이 보였다. 광해군 집권 초기 영의정에 재차 임명된 것을 보더라도 출발은 순조로운 듯했다.

그러나 이덕형은 대북파의 실세인 정인홍이나 이이첨의 과도한 행동을 묵과하지 않았다. 특히 광해군 3년(1611) 정인홍이 이황을 공격하자 이덕형은 세 번이나 상소를 올려 정인홍의 그릇됨을 지적하였다. 또 광해군 정권의 안정을 위해 이이첨이 주도한 영창대군 배척과 인목대비 폐모론 등에 반대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로 인해 1613년 이덕형은 모든 관직을 삭탈당했다. 이덕형은 권력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경기도 양근(지금의 양평)으로 낙향한다. 얼마 후 그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이때 나이가 쉰세 살이었다.

공교롭게도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후 임진왜란의 3대 수훈정승이었던 오성 이항복은 북청으로, 오리 이원익은 홍천으로 유배를 떠난다. 다시 이런 말이 생겨났다. “이씨 성을 가진 세 분의 정승이 죽지 않으면 귀양을 갔으니, 이 나라가 병들고 시들어 끝내는 망하지 않고 배기겠는가?” 그들을 홀대했던 광해군은 결국 비참한 종말을 맞았다.

글·이한우 (조선일보 기획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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