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신선로(神仙爐)는 조선조의 궁중연회에 빠지지 않던 음식이다. 그 이름도 ‘입을 즐겁게 해주는 음식’이라는 의미의 열구자탕(悅口子湯)이라 했으니 최고의 성가를 누린 찬선이 아닐 수 없다.
<진연의궤>에 그 재료로 “소안심살, 곤자손, 등골, 양, 간, 천엽, 돼지고기, 저태(楮胎), 꿩, 진계(陳鷄), 전복, 해삼, 표고, 은행, 호두, 녹두 가루, 숭어, 달걀, 게알, 무, 미나리, 파, 참기름, 밀가루, 간장, 후춧가루, 잣” 등이 기록된 것을 보면 그런 이름이 붙은 연유를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호사스러운 재료들로 만든 음식을 먹고 어찌 입이 즐겁지 않겠는가 말이다. 18세기 중반에 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조엄의 <해사일기>에는 대마도 도주로부터 스키야키를 대접받은 일화가 나오는데 “그들은 일미라 하여 승기악(勝妓樂)이라 불리는 것이 있으나, 그 맛이 어찌 감히 우리나라의 열구자탕을 당하겠는가?”라고 했다.
맛이 매우 뛰어나 기녀와 음악보다 더 낫다는 의미의 승기악보다 열구자탕을 한 수 위로 쳤을 정도니 그 맛에 대한 자부를 엿볼수 있다. 열구자탕은 이름도 다양하게 변하고 그 재료와 도구도 끊임없이 진화했다.


1795년의 <원행을묘정리의궤>에 열구자탕(悅口子湯)이 처음 등장하는데, 1827년의 <진작의궤>에는 열구자탕(悅口資湯)이라 하였고 그 이후에도 계속 그렇게 쓰다가 1892년의 <진찬의궤>부터 다시 열구자탕(悅口子湯)으로 바뀐다.
1868년의 <진찬의궤>에는 면신설로(麵新設爐)와 열구자탕이 같이 올라 있다. 1882년의 동궁가례를 기록한 어상기(御床記)에는 탕신설로와 잡탕신설로까지 나온다. 그 이전인 1740년경에 나온 <소문사설>에는 열구자탕(熱口子湯)으로 올라 있으며 <송남잡식>에는
열구지(悅口旨), <규곤요람>에는 구자탕, <이씨음식법>에는 열고자탕이라 하였다. <동국세시기>에는 “쇠고기나 돼지고기에 무, 오이, 훈채와 달걀을 섞어 넣고 장국을 끓인다. 이것을 열구자 신선로라 한다”라고 했다.
1809년의 <규합총서>와 그 이후의 <시의전서> 등에 오늘날의 이름인 신선로(神仙爐)가 등장한다. 최영년의 <해동죽지>와 홍선표의 <조선요리학>에는 훗날 신선이 되었다고 일컬어지는 연산군 때의 선비, 정희량이 만들어 먹은 것이라 신선로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야담 같은 해설도 나온다.
신선로라는 명칭은 조리용구의 이름이 음식명이 된 전형적 사례이다. 신선로의 크기를 1800년대 초의 <옹희잡지>는 대야만 하다고 기술하고 있어 옛날의 신선로는 지금 것보다 훨씬 크고, 따라서 여러 사람이 함께 먹던 음식임을 짐작하게 한다.
신선로의 재료는 기록마다 그 내용이 조금씩 다른데, 그때그때 구할 수 있는 최고의 재료를 쓴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신선로의 내력에 대해 식품사학자 고 이성우 교수는 중국의 훠궈(火鍋)가 우리의 신선로와 흡사한 도구를 쓰고, 또 많은 재료를 써서 만든다는 유사성을 근거로 제시하며 “그 기원은 중국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고 말한 바 있다.
조선 후기의 중국기행문인 서유문의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이나 김경선의 <연원직지(燕轅直指)>에 그곳 사람들이 열구자탕과 탕구자(湯口子)를 흔히 먹는다는 기록이 있어 중국유래설에 무게를 실어준다. 서울 압구정동의 한일관에서 현대화된 신선로를 맛볼 수 있다.
글·예종석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음식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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