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부산, 밀양 등 경상도 일대에서 즐겨 먹는 음식에 돼지국밥이 있다. 처음 접하는 타지 출신들에게는 왠지 이름부터 그리 호감이 가지 않는 투박한 음식이지만 한 숟가락 먹어보면 잡내도 없고 제법 엇구수한 것이 입에 착 감긴다. 새우젓으로 간을 하고 경상도 사람들이 ‘정구지’라 부르는 부추무침을 곁들이면 개운하기까지 해서 해장국으로 전혀 손색이 없다.
돼지국밥의 내력에 대해서 흔히들 6·25전쟁 때 북쪽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값싼 돼지고기로 국밥을 끓여 먹은 것이 시작이라고 한다. 그러나 부산이나 밀양 등지에는 그 이전부터 먹은 흔적이 있고, 일제강점기부터 돼지국밥을 팔아온 식당이 명맥을 잇고 있어 정설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
하지만 이북 음식에 돼지내복탕과 순댓국이 있어 피난민들이 그와 비슷한 돼지국밥에 열광하여 유행했을 가능성은 있다. 실제로 부산의 유명한 돼지국밥집 중에는 국밥에 순대를 섞어내는 곳도 있다. 돼지내복탕은 돼지 한 마리의 내장을 모두 끓는 물에 살짝 삶아 건진 다음 김치와 함께 끓여 먹는 음식이다.
사실 우리 선조들은 돼지고기와 친숙하지 않았다. <고려도경>에 “고려에 양과 돼지가 있기는 하나 왕공, 귀인이 아니면 먹을 수 없으니 백성들은 해품(海品)을 많이 먹고, 도살법 역시 서툴다”는 기록이 나온다. <태종실록>에도 “명나라 황제가 말하기를, ‘조선 사람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사신들에 소고기나 양고기를 주라’고 했다”는 대목이 보일 정도이다.


아무튼 돼지고기는 과거 우리나라에서 대중적인 식재료로 그리 각광받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조선시대 왕실의 연회를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나 <진찬의궤>, <진연의궤>에 저포탕(猪胞湯)과 저육탕(猪肉湯)이 등장한다.
저포탕의 재료 배합비율은 “돼지 등 2푼, 소의 위 4분의 1푼, 돼지 태 1푼반, 곤자소니·대가리 각각 1푼, 소내심고기 반 푼, 묵은 닭 1마리, 달걀 20알, 숭어 반 마리, 녹말가루, 실임자 각각 5홉, 잣 3 움큼, 생강 한 홉, 박고지 반 토리, 생파 반 단, 표고 7홉, 참기름 8홉, 간장 3홉, 후춧가루 1움큼”이라고 하니 대단한 보양식품이 아닐 수 없다.
고려시대에는 흔히 먹지 않던 돼지고기가 조선 말에는 왕실 잔칫상에 오를 정도의 고급 식품이 된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촌로 중에는 평생 돼지고기 한 점 구경하지 못하다가 우연히 관청에서 베푸는 잔치에서 먹게 되면, 곧 꿈속에서 돼지가 채소밭을 망치게 되는 꿈을 꾸는 자도 있다”라는 대목이 나올 정도로 귀한 식재가 된 것이다.
돼지고기가 일반의 사랑을 받지 못한 것은 아무래도 수급의 문제에 기인한 것이지 싶다. 그러다 보니 어쩌다 귀한 돼지를 한 마리 잡으면 내장까지 빼놓지 않고 해먹는 다양한 요리법이 개발된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19세기 초 빙허각 이씨가 펴낸 생활백과 <규합총서>에는 돼지껍질을 푹 고아서 족편같이 해먹는 저피수정회법(猪皮水晶膾法)이 나오고 그 후의 <시의전서>에는 돼지순대 조리법이 올라 있다. 그러다 아예 돼지고기로 탕반을 해먹는 서민풍의 돼지국밥에 이른 것은 아닐까.
1960년대에 이르러 정부의 장려로 양돈이 기업화되면서 돼지고기는 본격적인 대중화 시대를 맞는다. 돼지국밥의 명가로는 부산 서면의 ‘송정3대국밥’과 경남 밀양의 ‘동부식육식당’이 반세기를 훌쩍 넘는 역사를 자랑하고 서울에서는 망원동의 ‘합천돼지국밥’에서 그 진한 맛을 볼 수 있다.
글·예종석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음식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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