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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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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인물에 대해 역사적 평가를 할 때 공과(功過)를 운운하지만 아직은 자기 보고 싶은 쪽만 보려는 게 우리 지성계의 풍토다. 이럴 경우 방법은 하나다. 최대한 평가를 유보한 채 공에 해당하는 사실과 과에 해당하는 사실을 열거하면 된다.

정창손(鄭昌孫·1402~1487)에 대해 말하기에 앞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그가 사육신의 죽음과 관련됐다고 해서 지나치게 부정적으로만 묘사해 온 기존의 평가에 동의하기 어려운 점이 있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그릇이 크다는 평을 들었던 정창손은 스물다섯 살 때인 세종 8년(1426)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들어섰다. 시서(詩書)와 문장에 능했던 정창손은 세종이 집현전을 설치했을 때 당연히 집현전 학사로 선발됐다. 어쩌면 이때가 정창손으로서는 가장 행복한 관리생활을 보냈던 시기인지 모른다.

정창손은 정사에 적극적이었다. 세종 말년 세자(훗날의 문종)가 대리청정을 할 때는 이계전과 더불어 수십 차례에 걸쳐 정치개혁안을 올렸다. 이에 동료들이 걱정스럽게 “예로부터 일을 논하기 좋아하는 자는 나중에 반드시 재앙을 입게 돼 있소”라며 말리자 정창손은 “사람은 저마다 생각이 있는 것이오. 일을 논하다가 패하거나 영광스럽게 되는 것은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는 부끄러움보다는 낫소”라며 국정 논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사실 정창손을 일찍부터 눈여겨봤던 인물은 수양대군이다. 그래서 단종 때 영의정으로 있던 수양대군은 정창손을 발탁해 이조판서를 맡겼다. 문관들의 인사를 책임지는 이조판서를 맡겼다는 것은 그만큼 신임이 컸다는 의미다. 평소에도 세조는 “내가 경을 공경하는 것은 숙부와 다름없다”며 깍듯이 대했다.

정창손의 ‘불명예’는 세조 2년 성삼문 등이 세조를 축출하고 단종을 복위시키려 했던 사건과 관련된다. 즉 그의 사위 김질이 성삼문 등과 함께 모의하다가 그 사실을 장인 정창손에게 전하자 정창손이 즉각 위로 보고하여 사육신이 죽음을 당하게 된 것이다. 사실 정창손으로서는 일관되게 모셔 오던 임금에게 충성했을 뿐이다. 사위 김질은 몰라도 그의 행위가 배신은 아니다. 오히려 지나치게 도덕주의로 역사를 재단하는 관념적 역사학자들에 의해 명재상 정창손의 진면목이 폄하된 측면이 크다고 하겠다.

정창손은 이같은 ‘공’을 인정받아 이듬해 좌의정에 오른다. 이후 예종을 거쳐 열네 살 어린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원상(院相)이 되어 국정을 책임졌다. 정창손은 학문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관리로서 조직운영 능력도 뛰어났다.

그의 나이가 일흔 살을 넘었음에도 성종은 그에게 의지하는 바가 컸기 때문에 성종 6년(1475)에는 세번째로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일흔 살이면 치사(致仕·은퇴)하는 관례를 감안할 때 이는 파격적 조치였다. 당시 정창손이 의정부의 사무실이라 할 수 있는 묘당에 앉아 있는 광경을 <국조인물고>는 이렇게 그리고 있다.

“공은 묘당에서 큰 띠를 늘어뜨리고 홀(忽)을 바로 쥐고 아무런 소리나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는데도 마치 산악이 우뚝한 듯하였다.”

성종 18년 그가 세상을 떠나자 임금인 성종도 눈물을 떨구었다고 한다. 정창손이 경세가로서 제대로 조명되었으면 한다.

글·이한우 (조선일보 기획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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