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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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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불고기의 역사는 수난의 기록이다. 불고기의 유래는 우리의 조상으로 일컬어지는 유라시아 유목민의 후예, 동이족(東夷族) 또는 맥족(貊族)의 고기요리 맥적(貊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 진나라 때의 <수신기(搜神記)>에 맥적에 관한 기록이 나오는데 여기서 맥은 고구려를 가리키며 적은 꼬챙이에 끼워 불에 직접 구운 고기를 뜻한다.

유교 경서 <의례>에는 범적무장(凡炙無醬)이라 하여 적(炙)은 이미 조미가 되어 있기 때문에 먹을 때 장에 찍어 먹을 필요가 없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4세기 후반에 불교가 전래되자 육식은 이 땅에서 공식적으로 금지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1123년에 송나라의 서긍(徐兢)이 저술한 기행문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사신을 대접하기 위해 도축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솜씨가 서툴러서 몽둥이로 때려죽이고 그 후에 배를 가르기 때문에 오물이 마구 흘러내려서 그것으로 요리한 음식은 고약한 냄새 때문에 도무지 먹을 수가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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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식을 금지하다 보니 가축 잡는 솜씨가 엉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조상들은 고려 말에 이 땅을 점령했던 몽골인들에 의해 육식의 전통을 되찾게 된다. 당시 일본까지 침공하려던 몽골군은 고려 땅에서 소를 징발하려 했으나 소가 귀해서 원하는 만큼 구할 길이 없었다.

그러자 그들은 제주도에 목장을 만들어서 소를 키웠고 그것은 결국 육식을 금기시하던 고려 사람들에게 쇠고기를 먹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부터 우리 선조들의 쇠고기에 대한 선호성은 깊어지게 되고 사라졌던 맥적은 설야멱(雪夜覓), 설하멱(雪下覓), 설리적(雪裏炙) 또는 설야적(雪夜炙)으로 되살아나게 된다.

조선말의 <해동죽지>는 설야적을 “쇠갈비나 염통을 기름과 훈채(?菜)로 조미하여 굽다가 반쯤 익으면 냉수에 잠깐 담갔다가 센 숯불에 다시 구워 익히면 눈 내리는 겨울밤의 술안주에 좋고 고기가 몹시 연하여 맛이 좋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다 석쇠가 등장하면서 꼬치는 사라지고 너비아니가 나타나는데 <시의전서>는 “쇠고기를 얇게 저미고, 잔칼질로 자근자근 연하게 하여 갖은 양념에 재웠다가 굽는 것을 너비아니라 한다” 했다. 조선시대에 와서도 정부가 수시로 소의 도살금지령을 내리고 전담 관청을 두어 단속하기도 했지만 잘 지켜지지 않았고, 쇠고기를 좋아하는 습성은 국민들 사이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

오죽했으면 조선후기의 문신 송시열이 “우리나라 풍속은 우육을 상미로 삼았으며, 이것을 먹지 않으면 죽는 것으로 아니 도우금지령이 아무리 내려도 돌보지 않는다”고 한탄했을까.

불고기란 명칭은 8·15해방 후부터 쓰기 시작했는데 그즈음부터 요리로서의 위상은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6·25전쟁 후 쇠고기가 귀해지자 양을 늘리기 위해 고기를 채소와 함께 일본간장에 재우고 육수를 가에 붓는 불판에 구워 먹기 시작하면서 잠깐 대중화시대를 구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깃집들이 질이 떨어지는 고기를 사용하고 사람들의 입맛이 변하면서 그 뒤에 출현한 등심구이, 주물럭 등에 밀려 천대받는 메뉴로 전락하고 말았다.

옛사람들이 그 익히는 정도를 외(?), 오(奧), 태(?), 삼(?), 식(熄) 등 무려 십여 단계로 구분하여 즐기던 설야멱은 이제 사라진 것일까.

글·예종석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음식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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