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콩국수는 맛도 좋고 영양도 풍부해 무더운 여름을 견디는 데 도움이 되는 음식이다. 예로부터 콩은 ‘밭에서 나는 고기’라고 할 정도로 단백질이 풍부해서 서민들의 자양공급원 역할을 해 왔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익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가난한 백성이 얻어먹고 목숨을 잇는 것은 오직 이 콩뿐”이라고 했을 정도이다.
식품사학자 고 이성우 교수는 “콩의 원산지는 우리나라”라고 주장한 바 있다. 콩의 원산지로 일컬어지는 만주가 우리의 조상인 맥족(貊族)의 발상지이며 고구려의 영토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농경생활로 접어들면서 겪게 된 흰자질과 지방의 결핍 문제를 해결한 콩의 개발은 우리 조상의 위대한 슬기라고도 했다.
경기도 팔당 수몰지구의 청동기시대 유적에서 출토된 콩의 압문이 있는 무문토기가 우리나라 콩 재배의 오랜 역사를 실물로써 말해 준다는 것이다. 아무튼 콩의 가공은 콩나물, 두부, 장으로 이어지면서 우리의 음식문화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된다.
콩국수에 관한 기록은 19세기 말의 조리서 <시의전서(是議全書)>에 처음 나타나지만, 그 바탕이 되는 콩국은 오래 전의 기록에서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고운(孤雲) 최치원이 879년에 펴낸 우리나라 최초의 문집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에는 “지금 곡포(曲浦)에 의지하여 잠시 비려(飛廬)에서 내려왔는데 띠풀을 엮어 몸을 가리고 콩국을 끓여 배를 채우면서 남은 겨울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출발할 시기를 결정할까 합니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임진왜란 직후 비변사(備邊司)에서 선조 임금에게 전몰한 중국군의 제사 문제를 아뢰면서 “제구를 대략 장만하여 제사하게 하면 비록 보리밥·콩국물일지라도 곧 은택에 관계되므로 죽은 자가 감지함이 있다면 또한 어두운 속에서도 느껴 울 것입니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콩국을 그리 대단치 않은, 배를 채우는 음식 정도로 치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중기의 문신이자 학자로도 이름이 높은 정구(鄭逑)는 자신의 부인인 광주 이씨의 묘지명(墓誌銘)에 “부인들의 일반 행태 / 가난 고초 싫어하고 / 권세 이익 선망하여 / 가법 흔히 잘못되나 / 이 부인은 달랐으니 / 운명 있음 인정하여 / 나물밥에 콩국 먹고 / 천성 고이 보전했네”라고 썼다. 콩국을 평생 청렴한 선비를 내조한 검소한 삶의 상징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 후기 정약용의 <다산시문집>에는 “춘궁기를 당하여 뒤주가 비는 일이 갈수록 심해져서 콩국 마시는 걸로 만족해야 하니, 참으로 옛사람들에게 부끄럽습니다”라는 편지 구절도 보인다. 콩국이 구황식품의 역할도 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하긴 옛날에도 양반들은 여름에 콩국수보다 깨국수를 즐겨 먹었다고 한다.
<동국세시기>에도 여름의 시절음식으로 닭 국물에 볶은 깨를 갈아 섞은 뒤 밀국수를 말아 먹는 백마자탕(白麻子湯)이 나온다.
<시의전서>는 콩국수 만드는 법을 “콩을 물에 담가 불린 다음 살짝 데쳐서 맷돌에 갈아 체에 걸러 소금으로 간을 맞춘 후 밀국수를 말고 그 위에 채소 채 친 것을 얹는다”고 하였다. 참으로 재료에 충실한 요리법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의 콩국수 만드는 방법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니 콩국수의 맛은 콩과 면의 질이 좌우할 수밖에 없다. 서울 공릉동에 본점을 두고 있는 제일콩집과 분당 야탑동의 사계진미는 재료의 품질은 물론 정성까지 더한 콩국수 맛으로 이름난 집들이다.
글·예종석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음식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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