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아무리 뛰어난 인재도 시대를 잘못 만나면 그 재능을 제대로 펼칠 수가 없다. 조선시대 때도 이런 인물들이 참으로 많았지만 특히 그 가운데서도 불운했던 인물로 노사신(盧思愼·1427~1498)을 꼽을 수 있다.
세종 9년에 태어난 노사신이 벼슬길에 들어선 것은 단종 1년 때이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그의 벼슬길이 순탄치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사실 집안 배경만 놓고 본다면 노사신은 왕실 못지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조부 노한은 태종과 동서였고 우의정을 지냈으며 그의 아버지 노물재도 세종의 동서였다. 따라서 세조와 노사신은 이종사촌이었다. 친척이고 외척이고 인척이고 가까운 사람들을 중용했던 세조였기에 노사신 또한 세조 때는 탄탄대로를 달린다. 심지어 5품계를 한꺼번에 뛰어넘기도 하면서 세조 9년 도승지에 올랐고 이때 세조의 <주역> 주석 작업을 가까이에서 도왔다. 그만큼 노사신은 학문도 뛰어났다는 뜻이다.
조선시대 주요 인물들을 다룬 <국조인물고>에는 이런 대목도 나온다. “임금이 늘 밤중에도 권태를 모르고 책을 봄으로 (노사신은) 궁궐 안에서 유숙하는 날이 많았고, 때론 휴가로 나갔다가도 곧 부름을 받고 들어와 하루도 집 안에서 쉬는 일이 없었다.”
그릇이 크고 입이 무거웠던 노사신을 세조는 극진히 아꼈고 특히 군사와 호조의 업무에 밝아 <경국대전>을 편찬할 때는 호조행정을 다룬 호전(戶典)은 노사신이 혼자 집필하다시피 했다고 한다.
이런 배경과 인간됨, 그리고 학식을 두루 갖춘 노사신이었기에 성종 때도 그의 출세길은 보장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성종 1년 의정부 좌찬성 겸 이조판서가 됐고 성종 말년에는 좌의정을 지냈다.
이런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노사신의 말년은 불행했다. 벼슬살이 말년에 연산군 밑에서 영의정을 했기 때문이다. 사실 노사신의 입장에서 보자면 연산군은 외가의 증손자뻘이었으니 성군을 만들기 위해 각별한 애정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연산군일기>를 보면 연산군의 집권 초기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노사신이다. 자신의 성정을 잘 다스리지 못한 채 신하들의 군기를 잡으려는 어린 신왕과 이런 신왕을 제압하기에만 힘쓰는 조정의 젊은 신하들 사이에서 거중 조정을 맡은 이가 바로 노사신이다.
사실 노사신이 있었기에 연산군의 폭군적인 모습이 일찍부터 발현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기세등등한 연산군도 노사신이 하는 말이면 대부분 다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노사신으로서는 말년에 횡액을 만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순탄하게 쌓아온 평생의 이력이 결국 마지막에 가서 ‘연산군 때의 영의정’이라는 이력만으로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연산군 4년 무오사화가 한창일 때 세상을 떠난다. 그런데 이때 윤필상·유자광 등이 사림파 제거에 나섰을 때는 그 자신이 세조의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미온적으로나마 훈구 편에 섰다.
이 점이 때로는 오점으로 지적된다. 그러나 옥사를 확대하려는 유자광 등의 시도에 맞서 최대한 사림의 피해를 막아낸 사람이 바로 노사신이다. 그래서 무오사화는 다른 사화들만큼 큰 살육이 일어나지는 않았던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새롭게 재조명되어야 할 뛰어난 재상들이 많은데 노사신 이름 석 자도 반드시 그중 한 명으로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글·이한우 (조선일보 기획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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