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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감성여행 <무주로 떠나는 멋있는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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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무심코 리조트 발코니의 커튼을 열었을 때 생각지 못한 풍경이 나를 기쁘게 했다. 지난 밤 고속도로를 달려 이곳에 도착했을 땐 보이지 않던 덕유산 자락의 단풍이 햇빛 아래 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설악의 단풍은 이미 절정에 이르렀다지만 보다 남쪽에 들어앉은 덕유산의 그것은 조금 더딘 속도로 물들고 있었나 보다. 뾰족하게 솟은 설천봉이며 그 뒤의 향적봉과 중봉, 왼쪽으로 뻗은 칠봉에 이르기까지 죄다 온갖 색으로 물감을 칠해 놓은 듯 가을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는 곤돌라 탑승장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곤돌라는 쉴 새 없이 주말 여행자들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8명쯤 탈 수 있는 곤돌라에 올라탔을 때는 이미 이 산의 멋진 단풍에 대한 기대감으로 마음이 풍선처럼 둥실 떠 있었다. 겨울이면 스키어들에게 점령당하는 설천봉이지만, 가을만은 단풍나무들 차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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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돌라는 경쾌한 소리를 내며 기세 좋게 흘러내리는 작은 계곡의 상류를 따라 부드럽게 올라간다. 붉게 물든 당단풍 나무와 노랗게 변신한 참나무 종류의 온갖 활엽수들이 저마다 제빛을 뽐내며 서 있다. 어떤 것은 노랗고 다른 것은 노르스름하며 또는 연두에 가까운 노란색이거나 갈색에 가깝거나 하며 한데 얽혀 있는 모습이 아름답다. 간간이 소나무나 잣나무 등의 상록수들도 껴 있는지라 먼 데서 보면 이 산은 아무렇게나 물감을 섞어 휙 뿌려 놓은 것 같다. 곤돌라를 타고 15분쯤 올라가면 설천봉에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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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승장을 벗어나니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벌써 헐벗은 구상나무다. 굵고 짧은 몇 개의 가지만을 남겨둔 채 몸에 지니던 모든 것을 떨어낸 듯 이곳의 구상나무들은 앙상하기만 하다. 지난 태풍에 꽤 많은 수의 구상나무가 쓰러졌다는데 이 때문인지 남은 나무들 역시 더없이 지쳐 보인다. 유럽에서는 한국 전나무(Korean Fir)라 불리며 크리스마스트리로 애용된다는 구상나무를 정작 한국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한다.

제주 한라산이 원산지로 덕유산과 지리산 일대에 분포한다는 것과 현재 전세계에 퍼져 있는 구상나무는 모두 한국에서 가져다 식재된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이 나무가 빙하기의 역사를 간직한 살아있는 화석이라는 점까지, 구상나무에 대한 이야기는 방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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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상나무 군락을 뒤로하고 더없이 고요한 바람을 느끼며 향적봉으로 향한다. 설천봉에서 6백미터 정도 더 올라가 만날 수 있는 해발 1614미터의 향적봉은 덕유산 최고봉이다. 가파르지 않은 길을 산책하는 기분으로 20여분만 걸으면 되기 때문에 어린아이를 동반한 가족들도 등산하기에 제격이다. 새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는 높은 산중에는 단풍과 더불어 가을 야생화도 흐드러지게 피었다. 바람에 낭창낭창 춤을 추는 구절초와 쑥부쟁이도, 작고 귀여운 보라색 꽃을 올망졸망 피워 낸 산부추도 나무 아래 바위틈에서 꽃을 피웠다.

숲에는 곱게 물든 층층나무, 신갈나무가 있고 고로쇠나무 아래엔 고사리 따위의 양치식물과 조릿대도 가득하다. 나무 데크와 계단을 좀 더 오르면 어느 순간 사방의 시야가 트이는 향적봉에 도달한다. 가슴이 시원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발아래 보이는 산자락은 붉은 치맛자락을 두른 듯 황홀한 단풍의 풍경을 뽐내고 있다. 시야를 좀 더 멀리 두면 수묵의 담채로 그린 듯 겹겹이 늘어선 백두대간의 자태가 담백하고 강건하게 펼쳐진다. 바로 앞 중봉에서 시작해 삿갓봉과 남덕유산, 서봉을 지나 지리산의 천왕봉에 이르기까지 과연 우리나라는 국토의 70퍼센트가 산지로 구성돼 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실감하게 된다.

무주를 여행하는 날이 마침 5일장이 열리는 때라 읍내로 발길을 돌렸다. 해가 짧아진 탓에 평일 오후의 5일장은 생각보다 한산했지만 구경거리는 많았다. 1일과 6일로 끝나는 날에 열리는 무주 5일장은 ‘반딧불장터’라는 별칭을 가졌고 장날이 아니더라도 매주 토요일이면 여행자들을 위해 질 좋은 지역 특산물을 판매하는 장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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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 5일장의 역사는 189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19년 3·1만세 운동 당시 무주군민들이 장터에 모여 만세를 외쳤고, 한국전쟁 당시 폭격을 맞아 그 형태가 사라진 뒤에는 인근 무주교로 터를 옮겨 전쟁 구호품으로 흘러나온 군복이나 건빵, 지역 농산물을 거래하는 임시 5일장 형태로 명맥을 이어 갔다. 1953년 휴전 이후에 지금의 자리로 다시 돌아왔다.

가을의 5일장에서는 지금이 ‘결실의 계절’임을 느낄 수 있다. 싱싱한 가을배추나 무가 산처럼 쌓였고 무주에서 많이 재배하는 머루포도나 사과, 대추, 호두, 누런 호박, 속 예쁜 석류까지 갖가지 채소와 과일들은 마음을 기쁘게 한다. 다양한 버섯 종류들도 눈에 띈다. 도시의 마트에선 볼 수 없는 야생 싸리버섯이나 자연산 송이버섯도 있다. 거대한 느타리 버섯처럼 생긴 낯선 버섯이 있었는데 ‘굽더더기버섯’(흰굴뚝버섯)이라고 했다. 살짝 데친 다음 짝짝 찢어 가볍게 양념해 먹으면 더없이 맛나다고 상인이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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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논에서 잡아들인 메뚜기를 파는 좌판도 있다. 도시에서 자란 젊은 세대는 엄두도 내지 못하겠으나 나이 지긋한 어른들은 메뚜기를 보면 예전 생각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신다. 시장 가운데에는 재래시장에서 빼놓을 수 없는 순댓국밥집이 있다. 특히 기세 좋게 펄펄 끓고 있는 솥단지를 걸어 둔 ‘매일왕순대’ 집은 전통 있는 피순대로 유명하다. 돼지 내장의 다양한 부위로 만든 이집 모둠순대나 국밥은 무주 사람들이 장날 시장에 들렀다 꼭 한 그릇씩 먹고 가는 음식이다.

매일왕순대 집 옆에는 어죽과 어탕국수, 수제비를 맛나게 하는 ‘반디어촌’ 식당도 있다. 사실 무주를 여행하며 꼭 맛봐야 하는 음식 중 하나가 바로 어죽이다. 깨끗하고 맑은 금강의 민물고기로 만든 어죽은 무주가 자랑하는 맛이다. 보통 빠가사리(동자개)나 메기를 쓰는데, 고기를 잘 삶은 뒤 살만 발라낸 다음 쌀을 넣고 푹 퍼지도록 끓여낸 뒤 얼큰하게 양념해 만든다. 뜨거운 어죽 한 그릇을 땀 뻘뻘 흘리며 후루룩 먹고 나면 환절기 감기가 뚝 떨어진다. 요즘엔 민물고기도 양식한 것을 많이 써 예전의 맛보다 못하다고들 하지만 한 번 맛본 다음엔 두고두고 생각나는 특별한 음식임에 틀림없다.

무주 머루와인은 깊은 터널 안으로 들어가야 만날 수 있다. 무주 사람들이 드라이브를 즐기는 구불구불한 적상산성길을 따라 올라가면 머루와인동굴에 닿는다. 청도의 와인터널과 비슷한 콘셉트이지만 이곳의 동굴은 기차터널이 아닌 인근 양수발전소 건설을 위해 뚫은 작업용 터널을 이용해 만들었다. 길이 5백79미터, 너비 4.5미터, 높이 4.7미터의 커다란 동굴 속에서 무주의 머루로 담근 술이 좋은 향기를 풍기며 익어 가고 있다. 일반 포도보다 맛과 향이 진한 ‘머루’는 야생포도를 가리키는 순우리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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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는 국내 최대의 머루 생산지다. 무주에서 머루를 생산하는 1백10여 농가가 4개의 와인 생산업체와 손잡고 생산하는 무주 머루와인은 루시올뱅(무주군산림조합)과 샤또무주(샤또무주), 붉은진주(칠연양조), 구천동머루와인(덕유양조) 등 네 가지. 입장료를 내고 동굴 안으로 들어가면 시음용 와인 잔을 받아 무주의 머루와인들을 맛볼 수 있다. 네 가지 브랜드의 와인 모두 ‘드라이’와 ‘스위트’ 와인으로 생산되는데 와인동굴에서는 대중적인 입맛에 맞게 주로 ‘스위트’ 와인을 맛볼 수 있게 했다.

‘붉은진주’는 순수한 머루 원액을 발효시켜 만들어 진하고 달콤한 맛이 인상적이며 ‘구천동머루와인’은 머루의 독특한 향과 특유의 신맛이 조화로우며, 다른 머루와인과 달리 빈티지와인으로 생산되는 ‘샤또무주’는 아름다운 보랏빛과 신선한 향이 느껴진다. 맛을 보고 나면 입맛에 맞는 와인을 구입할 수도 있고 특별한 날 찾을 수 있도록 보관 서비스를 이용할 수도 있다.

와인동굴을 찾은 어린이나 술을 못 마시는 사람들은 입장권으로 머루아이스바 또는 주스 등을 맛볼 수 있다. 좀 더 전문적인 머루와인 관련 정보를 얻고 싶다면 각 와인브랜드의 양조장을 찾아 시음과 체험을 해 볼 수 있는데 미리 전화로 방문 관련 문의를 하면 된다. 머루와인동굴을 둘러봤다면 적상산전망대 쪽으로 드라이브를 가 봐도 좋겠다. 인공저수지인 적상호까지 연결된 산길은 꽤 구불구불해 운전에 주의해야 하지만 그만큼 수려한 산세를 자랑한다. 아름다운 바위와 어우러진 숲 덕분에 길은 더욱 낭만적이다.

글·고선영 (여행작가) / 사진·김형호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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