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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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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신숙주(申叔舟·1417~1475)에 대한 학계의 평가나 일반인의 인식은 그다지 좋지 않다. 늘 양지만을 추구했다는 인식 때문이다.

그러나 신숙주는 단순히 기회주의적인 처신으로 영달을 누린 인물이 아니다. 탁월한 능력과 신중한 처신이 그의 출세 비결이라면 비결이다.

스무살 때인 세종21년(1439년) 문과에 급제한 신숙주는 집현전 학사로 선발돼 세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으며 승진을 거듭했다. 집현전 근무 시절 그의 독서열은 당시에도 화제가 될 만큼 강렬했다. 도서관 격인 장서각에 살다시피 하며 온갖 책들을 두루 섭렵했고 숙직을 하게 될 때는 밤늦도록 책을 보아 세종이 걱정을 할 정도였다.

흔히 신숙주가 훈민정음 창제에도 관여했다고 하는데 훈민정음 창제가 세종25년임을 감안하면 창제보다는 창제 이후 반포까지 3년 사이에 훈민정음이 글자로서 제대로 기능하는지를 점검할 때 깊이 관여한 것으로 봐야 한다. 이 무렵 언어학자이자 명나라 한림학자인 황찬이 죄를 짓고 요동에 유배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세종은 신숙주를 무려 13번이나 보내 훈민정음을 질정(質正)토록 했다.

그에게 역사적 시련이 다가온 것은 단종 즉위년(1452년)이다. 이때 수양대군이 사신이 되어 명나라에 가게 되었는데 수양은 신숙주를 서장관(기록을 맡은 사신)으로 추천했다. 이 사행(使行)으로 인해 세조와 신숙주는 동지적 관계를 형성한다.

이듬해인 1453년(계유년) 겨울 수양이 한명회 등과 정란을 일으켰을 때 신숙주는 외직을 맡아 지방관리로 나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양은 손수 교서를 써서 “만리 길을 동행하며 나라를 위해 죽기를 맹세했다”며 정난공신에 책봉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도승지에 오른다.

그러나 세조2년(1456년) 여름 사육신의 옥사가 일어났다. 이때 세조는 신숙주로 하여금 옥사를 다스리게 하였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집현전의 옛 동료들을 처벌하는 지위에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훗날 두고두고 그에게 ‘변절자’라는 딱지가 붙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이런 명분과는 별개로 세조와 신숙주의 관계는 가장 바람직한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모범 사례로 거론되기도 한다. <국조인물고>에서는 신숙주를 이렇게 평하고 있다.

“공은 오래도록 요직을 맡으면서 조용하고 순리에 맞게 하되 항상 은근한 비유로써 임금의 마음을 만족시켰고 일찍부터 직언을 팔아서 자기 이름을 높이려 하지 않았다.”

바로 이 때문에 아부만 하던 신하라는 혹평이 따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래서 세조는 항상 “제나라 환공에게 관중이 있고 당 태종에게 위징이 있었던 것처럼 나에게는 신숙주가 있다”고 말하곤 했다.

신숙주는 병사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세조2년 병조판서에 올랐고 세조6년에는 강원 함길(함경) 양도의 도체찰사가 되어 야인을 정벌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세조에 이은 예종이 일찍 세상을 떠났을 때 어린 성종을 왕위에 올려야 한다고 정희대비에게 주청한 장본인이 신숙주다. 그리고 성종 때 그는 영의정에 오른다. 벼슬로서는 최고의 정점에 오른 것이다.

신숙주는 중국어와 일본어에도 능통했다. 그래서 일본과 여진의 산천과 요충지 등을 상세히 기록한 지도를 만들어 훗날 국방의 기본서적이 되게 하였다.

글·이한우 (조선일보 기획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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