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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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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부의 역사는 오래됐다. 중국의 의서 <본초강목>이나 우리나라의 <명물기략>, <재물보> 같은 고서들은 한결같이 두부를 2천 여 년 전 한나라의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발명한 것이라 기술하고 있다.

물론 여기에도 이론은 있다. 일본의 식문화연구가 시노다 오사무(篠田統)는 대만 작가 린하이인(林海音)의 <중국두부>에 수록된 두부고(豆腐考)라는 글에서 수, 당대까지의 많은 중국 문헌에 두부에 관한 기록이 전혀 나오지 않다가 송대 초기의 학자 도곡(陶穀)의 <청이록(淸異錄)>에 처음 등장한다고 주장한다. 이와는 반대로 정약용은 <아언각비>에서 중국 고서를 인용하여 회남왕 이전에 두부를 먹었다는 풍설을 언급하고 있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 두부의 자취는 고려 말의 문신 이색의 시문집인 <목은집(牧隱集)>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나물국 오래 먹어 맛을 못 느껴 菜羹無味久/ 두부가 새로운 맛을 돋워 주네 豆腐截昉新/ 이 없는 사람 먹기 좋고 便見宜疏齒/ 늙은 몸 양생에 더없이 알맞네 眞堪養老身”라는 시구가 바로 그것이다.

두부는 우리나라에서 사찰음식으로 발전해 왔는데 그 이름을 포(泡)라고 하였다. 예로부터 왕릉 인근에는 항상 두부 만드는 절인 조포사를 두어 제수를 준비하게 하였다고 한다.

“오직 남한(南漢)·북한(北漢) 및 여러 도(道), 산성(山城)을 수호하는 절과 여러 능에 두부를 공급하는 절은 면세토록 함이 마땅하고 나머지는 용서할 수 없다”는 <경세유표>의 구절에서 그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옛날부터 유명한 두부에는 ‘봉선사두부’, ‘연도사두부’ 하는 식으로 절 이름이 앞에 붙는 연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조선의 두부 만드는 솜씨는 종주국인 중국에도 이름을 떨쳤던 모양이다. <세종실록>에 명나라 황제가 “왕이 먼젓번에 보내 온 반찬과 음식을 만드는 부녀자들이 모두 음식을 조화하는 것이 정하고 아름답고, 제조하는 것이 빠르고 민첩하고, 두부를 만드는 것이 더욱 정묘하다”며 그 재간을 칭찬한 대목이 나온다.

일본의 두부는 조선에서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최남선의 <조선상식문답>은 한국의 두부가 일본에 전해진 과정을 설명하는 두 가지 설을 기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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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는 임진왜란 때 일본의 한 장수가 조선에서 그 제조법을 배워 갔다는 설이요, 다른 하나는 역시 임진왜란 때 포로로 끌려간 박호인(朴好仁)이라는 사람이 지금의 고치(高知)현에서 두부를 만든 것이 근세 일본 두부제조업의 시초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일본에는 그 이전인 헤이안시대(平安時代, 794~1192) 말부터 두부가 있었다는 설도 있다.두부는 오랜 세월 각종 요리는 물론 다양한 국이나 찌개에 빼놓을 수 없는 부재료로, 우리의 입을 즐겁게 하며 단백질 공급원 역할을 해 왔다. 추사 김정희가 말년에 남긴 작품에 “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 나물이요 大烹豆腐瓜薑菜/ 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딸 손자와 함께하는 것이다 高會夫妻兒女孫”라는 시구가 있다. 우리의 식생활에 두부가 차지하는 위상을 잘 말해 주는 글귀이다.

음식의 철을 가리지 않는 세상이 되었지만, 그래도 <동국세시기> 시월조에 “지금의 반찬 중에서 가장 좋은 음식은 두부”라고 하였듯 요즘이 두부의 계절이다. 서울 서초동의 백년옥은 다양한 두부요리로 이름을 떨치고 있고, 강원도 속초의 김영애할머니순두부는 부드러운 순두부로 반백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강릉의 초당할머니 순두부는 바닷물을 간수로 쓰는 초당두부의 명성을 이어 가고 있는 집이다.

글·예종석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음식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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