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영화 <광해>가 큰 인기라고 한다. 그러나 아직 학계에서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싸늘하다. 필자도 광해군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그가 재위 기간에 어떤 업적을 이루었는지 모르지만 무엇보다 자기 정권도 지키지 못하는 무능함은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광해군은 김류와 이귀, 두 사람이 이끄는 반정(反正)으로 인해 권좌에서 비참하게 내쫓겼다. 그럼에도 이 두 사람을 기억하는 이는 그다지 많지 않다. 오늘은 이 두 사람 중에서 이귀를 살펴보려 한다.
이귀(李貴·1577~1633)는 서인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송익필과 이이에게서 학문을 익혔다. 생원시에 합격은 했지만 문과에는 급제하지 못한 상태에서 동인을 공격하는 상소를 올리는 등 일찍부터 당쟁에 깊이 관여했다.
그의 첫 벼슬은 강릉(康陵)참봉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기충만한 그는 선조의 어가를 따르다가 광해군의 분조에 동참했다. 이때 그는 좋은 평가를 받아 공조좌랑으로 특진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나고 선조 말 이귀는 지방의 말직을 떠돌았다.
이귀가 본격적으로 중앙정치에 관여하게 되는 것은 광해군이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을 죽이려 할 때였다. 결국 김제남, 영창대군이 차례로 죽고 인목대비는 서궁에 유폐되는 신세가 됐다. 이때부터 이귀는 아들 이시백, 이시방과 더불어 거사 준비에 들어갔고 동지들을 비밀리에 규합했다. 광해군15년(1623년) 3월 13일 마침내 거병하여 능양군을 추대하고 광해군을 내쫓는 반정에 성공했다.
당연히 이귀는 아들들과 더불어 공신 반열에 올랐고 탄탄대로를 달리게 된다. 그러나 지나치게 직선적인 성격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같은 공신들끼리 충돌을 불사하며 자기 주장만을 고집했기 때문에 인조로서도 이귀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의 건의가 때로는 옳았지만 때로는 지나쳤다.
이귀가 동지인 서인들에게 집단 따돌림을 당하는 사건은 인조4년(1626년) 정월 병조판서로 있을 때 인헌왕후가 세상을 떠나면서 생겨났다. 인헌왕후란 실은 왕위에 오르지 못한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의 부인이다. 이때 1년상으로 할 것인지 3년상으로 할 것인지가 논란의 핵심이었다.
왕실과 거리를 두려는 서인들은 당연히 1년상을 주장했다. 그런데 이귀는 서인이면서도 3년상을 주장해 서인의 수장인 김장생 및 남인의 수장 이원익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이귀는 친왕실 노선을 택한 것이다. 그로 인해 서인 일색인 삼사(三司 : 사헌부·사간원·홍문관)에서 집중 탄핵하여 이귀는 병조판서직에서 내쫓기게 된다.
그러나 인조는 자신의 당파를 부정하고 왕실을 거든 이귀를 깊이 신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이귀는 2년 후 다시 병권을 쥐는 병조판서로 복귀한다. 그런데 이귀는 호란이 임박해 상황이 급박해지면 강화도나 남한산성으로 피신해 장기전에 대비해야 한다는 의견을 올렸다가 일종의 주화론자로 몰려 서인들의 표적이 되곤 했다. 그러나 이귀는 이후 줄곧 당파보다는 임금을 선택함으로써 서인들로부터 부정적 평가를 받게 되었고 그것이 어쩌면 지금도 이귀에 대한 조명이 별로 없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글·이한우 (조선일보 기획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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