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인종·종교·역사 문제 때문에 오랜 내전과 인종청소를 겪었던 보스니아의 도시 모스타르. 주민들은 화합과 평화를 축원하는 동상을 세우기로 한다. 누가 제일 좋을까. 주민들의 답은 이소룡이었다.
그 어디든 오래된 중세의 냄새가 짙게 배어나는 도시 모스타르 한 가운데에 웃통을 훌떡 벗은 채 쌍절곤을 옆구리에 찬 노란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이소룡이라….
이유는 딱 하나다. 모든 주민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인물이 이소룡뿐이라서. 아무런 연고 없는 이곳에 서 있는 이소룡 동상 앞에서 저자는 “공유할 수 있는 뭔가를 갖다두고 여기에 기대어 분열과 갈등을 막아보려는 주민의 의지에 고개가 숙여진다”고 썼다.
그래서 이종헌 UPI 서울지국장이 쓴 <낭만의 길 야만의 길>은 성찰적이다.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폴란드, 체코, 헝가리 등 동유럽의 낭만적 풍경에서 야만적 역사를 떠올린다는 점에서 그렇다. 또 안으로는 분단과 지역감정으로 찢겨진, 밖으로는 한·중·일 역사전쟁을 치르고 있는 조국을 떠올렸다.
체코의 바츨라프광장에서 저자는 ‘프라하의 봄’이 당시 체코 국민 1인당 GDP가 3천달러가 넘었을 때 벌어졌다는 점을 강조한다.
북한의 소득은 1천달러 미만이다. 더구나 북한은 동유럽처럼 강인한 종교적 결속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국제사회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에너지 자원이 있는 것도 아니다.
‘북한의 붕괴를 바라지 않는 절대 강자 중국’도 버티고 있다. 급작스런 변동이 옳으냐 그르냐를 떠나, 이런 상황에서 북한 주민들이 민주화를 요구할 수 있을까, 요구한다 한들 국제사회가 지원해줄 수 있을까 고민한다.
세르비아에서는 일본의 얼굴을 떠올렸다. 사람들은 코소보 침공사태를 일으킨 세르비아를 비난하지만, 세르비아는 오히려 자신이 억울한 피해자라 생각한다. 동방정교를 믿고 있다는 이유로 가톨릭, 개신교는 물론 심지어 이슬람세력도 우릴 배척하지 않았던가?
특히 가톨릭인 크로아티아는 세르비아에 대해 인종청소까지 시도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또 당하기 싫어서 먼저 군사행동을 했기로서니 그게 그렇게 몹쓸 짓이었던가? 시내 곳곳에 나토군이 폭격한 자리를 고스란히 보존해둔 세르비아의 모습에서, 침략에 대한 반성보다 원폭 피해자임을 내세우는 듯한 풍경이 오버랩된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아무래도 폴란드 얘기다. 폴란드는 늘 이웃강대국 독일·러시아에 시달렸다. 자신들의 특권만 보장된다면 국적 따윈 상관없는 귀족들은 나라를 팔아먹었다.
그래서 독립운동은 늘 프랑스·영국·미국 등 외세에 기댔다. 이 기대는 배반당하다 결국 공산화됐다. 저자는 구한말 국제정세에 대한 정확한 분석 없이 친일, 친러, 친미로 갈라져 큰 희생을 치르고 결국 일본에 합병된 우리나라를 떠올렸다.

그런데 이 정도라면 ‘성찰’이라 부르기 어렵다. 저자는 한걸음 더 나아간다. 이런 고통의 역사 때문에 폴란드는 극도로 강력한 민족주의로 무장해버린다.
공식 역사에다 나치즘이 노린 것은 유대인이 아니라 폴란드인이라 기록할 정도였다. 가장 잔혹했던 아우슈비츠가 폴란드에 있어서 어느 누구보다 그 실상을 잘 알면서 말이다.
아우슈비츠에서 저자는 더 경악한다. 이곳을 방문한 이스라엘 학생들이 ‘참배와 추모의 표정’을 짓는 대신 이스라엘 국기를 어깨에 두르고 전의에 찬 표정으로 전시장을 헤집고 다니는 풍경을 봤기 때문이다. 화해와 협력, 과연 가능할까.
남 탓 할 것 없다. 저자가 보기에 “한편에서는 반공교육, 다른 편에는 반미교육이 세대를 넘어 유지”되고 있는, “상대에 대한 집단적 기억과 집단적 증오”를 키워가는 측면에서는 우리도 별 달리 나을바 없기 때문이다. 엄지로 코 한번 튕기고 아뵤~ 괴성 지르는 이소룡 동상 앞에서, 저자가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던 이유다.
글·조태성 (서울신문 문화부 출판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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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