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초가을에 문득 늦봄이 생각났다. 다 바람 탓이다. 귓가를 간질이는 선선한 가을바람이 오즈 야스지로의 <만춘>의 도입부를 떠올리게 했다.
바람에 몸을 뉘었다 일으키는 나뭇잎들과 무심히 흘러가는 구름들을 보고 있노라면 분주하던 마음속이 차분히 가라앉는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나가고, 과년한 딸을 시집보내려는 아버지와 아버지를 혼자 두고 떠나고 싶지 않은 딸의 애틋한 일상 속에서 영화는 시작된다. 아버지는 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고모와 함께 재혼하려는 것처럼 꾸미고, 딸은 남모르는 배신감에 자신도 누군가와 혼인을 약속한다. 그렇게 헤어짐을 준비하게 된 부녀가 마지막 여행을 떠나는 곳이 교토다.
일본의 고도(古都)에서 딸은 아버지에게 아직 오지 않은 시간에 대한 두려움과 망설임을 고백한다. 어쩌면 아버지가 자신을 붙잡아주길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더불어 흘러가는 법을 가르칠 뿐. 부녀가 함께 보내는 마지막 밤 속에서 가만히 눈을 떠 허공을 바라볼 때면 알 수 없는 감정으로 마음 한구석이 그득 찬다. 그리고 마지막에 아버지가 텅 빈 집에 홀로 남아 사과를 깎을 때 그득 차 있던 그 무언가가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우리의 일상으로 돌아오겠지만, 필시 다른 곳에서 함께 가을바람을 맞고 있을 누군가가 떠오르고 말 것이다.


장례식장에 가보면 이따금 그런 생각이 든다. 이곳이 죽은 자를 핑계 삼아 산자들이 서로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자리구나. 임권택 감독의 <축제>가 찾아간 남도의 한 마을에도 그런 자리다.
유명 소설가 이준섭은 노모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을 찾는다.
장례는 절차대로 순탄하게 진행되는 듯하다. 그러다 준섭의 이복동생 용순이 나타나면서 친척들 사이에 깊게 패 있던 감정의 골이 드러난다. 급기야 용순은 이복자매 형순과 싸움을 벌이고, 거기에 준섭의 문학세계를 취재하겠다며 따라온 문학기자까지 가세한다. 그렇게 외지인과 동네사람들이 한데 뒤섞이고 얽혀드는 가운데 한 사내가 초경을 시작한다.
그런데 사실 이 난장판보다 보는 이의 마음을 흔드는 것은 사이사이에 끼어드는 플래시백이다. 그중 특히 한 장면이 마음을 빼앗는다. 용순이 돈을 훔쳐 마을을 뜨기 전, 머리에 고무대야를 이고 노모와 시골길을 나란히 걸었던 장면이다.
그들의 뒷모습만 보고 있어도 객지생활을 하며 앙상해진 마음과 몸에 조금씩 살이 붙는 것 같다. 그리하여 마지막에는 모든 식구가 한데 모여 사진을 찍는데, 찰칵하는 소리가 너무도 경쾌하여 그간의 사건들이 모두 하룻밤의 꿈처럼 금세 아련해진다. 시끌벅적했던 추석의 옛 풍경마저 그리워지는 순간이다.

지난해 여름, 스티븐 스필버그의
하지만 잠시 후 기억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영화가 펼쳐졌다.
수색대가 E.T.를 뒤쫓는 초반부는 어둠 속에서 가만히 빛났던 느와르 영화들처럼 최소한의 빛으로 관객을 에워쌌다. 혹은 흡사 무성영화처럼 진행되며 단숨에 관객을 스크린 너머로 납치해 갔다.
뒤에 펼쳐질 저 유명한 자전거 비행 신이 또 얼마나 영롱한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그런가 하면 소년들이 E.T.를 집으로 돌려보내는 마지막 신은 지금 이 나이에 봐도 눈시울이 붉어질 만했다.
혹자는 아직도 스필버그를 유치하다고 욕할지 모르겠지만, 그가 이 시대의 가장 뛰어난 영화 작가 중 하나라는 사실은 <우주전쟁>이 증명했고, <워 호스>가 재확인시켰다. 두 작품을 포함한 그의 21세기 영화들이 원숙기에 속하는 영화들이라면

토니 스콧 감독이 다리 밑으로 몸을 던졌다고 했을 때 어쩐지 이상하게 들리지 않았다. 차라리 어딘지 그와 어울리는 마지막 장면이라고 느껴졌다. 속도광이자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겼던 그에게는 죽음도 일종의 스포츠가 아니었을까. 그가 왜 자살했는지는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겠지만 그가 어떤 감독이었는지는 전혀 미스터리가 아니다.
마초 액션 감독이었던 그의 진수를 확인하고 싶다면 망설이지 말고 유작 <언스토퍼블>을 집어들기를 권한다. 기관사 없이 다량의 화약 물질을 싣고 시속 70킬로미터로 달리는 화물열차가 이 영화의 몸통이다. 인구 과밀 지역에 세워진 공장 하나를 끼고 도는 곡선회로를 통과하기 전까지 세우지 못한다면 열차는 거대한 미사일로 둔갑할 지경이다. 결국 열차를 세우기 위해 두 기관사가 사투를 감행하게 되는데, 두 남자의 이야기와 액션을 배열하는 과정에서 토니 스콧만의 위엄이 느껴진다.
과잉된 자의식은 철저히 배제돼 있고 액션의 나열만으로 이야기를 이끌어나간다. 노동 계급으로 분한 덴젤 워싱턴의 군더더기 없는 연기도 빛난다. 두 남자는 <데자뷰>, <펠햄 123>에서도 탁월한 파트너십을 보여준 바 있다.
추석 내내 방에 틀어박혀 릴레이로 볼 수 있는 무언가를 찾고 있다면, 바로 이것. <본드 50 - 007 시리즈 50주년 기념 한정판 박스세트>다.
<007 살인번호>부터 <007 퀀텀 오브 솔러스>까지, 현재까지 나온 007 시리즈 22편을 총망라한 초대형 박스세트다. 한꺼번에 급하게 소화하려다가는 체할 양이다.
<007 스카이폴>의 개봉 예정일 10월 26일을 한 달 앞둔 9월 25일에 발매되니 추석부터 미리 야금야금 까먹기에 안성맞춤이다. 물론, 이 정도의 부피감이라면 사실 복습이 무의미해지기도 한다. 007 시리즈가 충실한 복습을 요구하는 프랜차이즈도 아니거니와, 22편을 굳이 순서대로 볼 필요도 없을 것이다.
제일 재미있는 007부터 훑어 내려가고 싶다면 한 영화잡지가 2008년 <007 퀀텀 오브 솔러스> 특집 때 선정해 놓은 리스트가 참고하기에 유용하다. 중간 순위야 취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최고의 007이 1964년 가이 해밀턴이 감독한 <007 골드 핑거>라는 데 대해서는 이견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스크롤바를 내릴수록 <골드핑거>를 넘볼 만한 후보작들이 자꾸 눈에 들어온다. <여왕폐하 대작전>, <썬더볼>, <위기일발> 등. 어쩐지 나 홀로 올림픽을 부르는 시리즈다.
글·이후경 (씨네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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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