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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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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조선시대 선비로서 과거를 거치지 않고 고위관직에 나갈 수 있는 길은 정변에서 큰 공을 세우거나 조선 중기 이후 유일(遺逸)로 천거를 받는 것이었다. 유일이란 뜻 그대로 내버려져 있는 선비라는 뜻으로 학문이나 행실이 뛰어나다고 판정이 날 경우 조정에서 특채하는 것을 말한다.

사실 이 같은 유일들을 등용하는 방법으로 조광조가 추진했던 새로운 형태의 과거가 바로 현량과였다. 그러나 현량과는 다분히 주관적이기 때문에 조광조가 제거되면서 현량과도 폐지되어 때문에 유일들이 벼슬길에 나서는 길은 전란이 아니면 천거의 방법밖에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같은 유일 천거가 본격적으로 시행된 것은 선조 때의 일로써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인물이 성혼(成渾·1535~1598)이다. 성혼은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했으나 문과에 응시하지 않고 학자의 길을 택했다. 그 이유는 분명치 않다.

성혼이 살던 파주 땅에는 이이(1536~1584)와 송익필(1534~1599)이 살았다. 이들은 명종비였던 인순왕후 심씨의 친동생 심의겸과 가까웠다. 심의겸도 파주의 광탄에 살았다. 이이와 심의겸은 문과를 거쳐 관리의 길을 걸었던 반면 송익필은 신분문제로 과거에 나갈 수 없어 성혼과 어울리며 성리학 공부에 매진했다.

이이와 송익필은 후궁 손자 출신 선조를 내심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의 주기론(主氣論)은 신하가 주인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반면 주리론(主理論)은 출신과 상관없이 임금은 임금이라는 논리였다.

성혼은 이이나 송익필과 학문적 견해가 거의 비슷하면서도 조금은 절충적인 입장이었다. 그것은 이황의 영향 때문이었다. 이황은 주리론자였다.

벼슬길에 나간 이이는 특진에 특진을 하며 탄탄대로를 달렸다.

더불어 서인의 힘이 강해지면서 마침내 이이는 서인인 성혼을천거했다. 1573년의 일이다. 2월에는 공조좌랑, 12월에는 사헌부 지평에 제수됐다. 좌랑은 정6품, 지평은 정5품에 해당하는 고위직이다. 문과를 거치지 않고서 이처럼 고위직에 임명된 사례는 조광조의 기묘사화 이후 처음이다. 따라서 성혼은 유일천거의 길을 연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성혼은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1581년 2월에는 선조가 성혼을 불러 학문과 정치에 대해 묻기도 하였다. 이 같은 선조와 성혼의 밀고 당기기는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동시에 성혼에게 내려지는 벼슬은 점점 더 올라갔다.

1584년 이이가 죽은 직후에 성혼은 중추부 동지사에 제수되었다. 종2품의 참판에 해당하는 고위직이다. 이때는 잠깐 관직에 나가지만 곧바로 사직했다. 그리고 1587년 정여립의 난으로 서인이 정권을 장악하자 이이를 대신하여 서인을 이끌기 위해 이조판서를 맡기도 했지만 곧 사직한다. 참혹한 피해를 입은 동인들의 원성이 모두 그를 향했기 때문이다.

그는 생전에 이처럼 전면에 나서는 것을 꺼렸다. 그 때문일까?

이이·송익필·성혼을 받드는 서인은 뒤에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서게 되는데 노론은 이이와 송익필을, 소론은 성혼을 이론적 지주로 받든다. 노론은 철저한 신권(臣權)주의인 반면 소론은 조건부 친왕파였다. 소론의 이 같은 성향은 아마도 성혼이 생전에 이황의 영향을 받은 때문인지 모른다.

글·이한우 (조선일보 기획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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