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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감성여행 <속초~고성 7번 국도에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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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생긴 경춘고속도로를 달려 인제를 지나 설악산 미시령을 넘으면 속초시내로, 진부령을 넘으면 고성 방면으로 이어진다.

속초로 바로 내달리려던 마음이 바뀐 것은 ‘진부령미술관’이라고 쓰인 작은 표지판을 발견하고 나서였다. 깊고 깊은 산중, 겨울이면 황태덕장으로 빼곡히 들어설 고갯길 정상에 미술관이라니. 혹시나하고 삐죽 미술관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는데 1층 전시실부터 1960~70년대 영화작품 포스터와 배우 사진들이 잔뜩 눈길을 사로잡는다. 진부령미술관 관장의 이력 덕분에 걸린 사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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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돌아오지 않는 해병> <꼬마신랑> <마부> 등 한국 근대영화사에 큰 획을 그은 작품을 제작한 전석진 선생이 바로 진부령미술관의 관장이다. 전 관장은 아르바이트 삼아 영화 시나리오 등사 일을 하다가 영화 마케팅 일을 시작했다. 영화 제작을 담당하면서는 15년 동안 46편의 영화를 기획하고 제작하며 한국 영화계의 큰손으로 자리 잡았다.

“1963년 국도극장에서 <돌아오지 않는 해병>이 개봉했을 때는 극장 앞에서부터 인현동길, 명보극장 앞까지 관객의 줄이 이어졌지. <꼬마신랑>도 마찬가지였고. 배우 문희나 가수 나훈아를 발굴했고 이미자가 톱스타 반열에 오르도록 도왔다고, 내가.”

하는 일마다 운이 따라 잘됐기에 즐겁게 일할 수 있었다며 백발의 노신사는 호탕하게 웃는다.

해발 520미터 진부령 꼭대기에 있는 진부령미술관의 탄생은 1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스키를 타러 진부령을 넘던 전 관장의 눈에 폐건물이 된 고성군 간성읍 출장소가 눈에 띄었다. 건물이 서있는 위치가 아깝다고 느껴 재활용하자고 고성군청 관계자들을 설득했다. 2009년 새로 건물을 지어 미술관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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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은 비록 작은 규모지만 정상급 작가들의 작품으로 늘 빛난다. 오는 7월 말까지 계속되는 <더 로즈>전은 뉴욕과 한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작가 심명보의 개인전이다. 심명보는 장미를 상처받은 영혼을 위로하는 상징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생명체로 활용하고 있어 ‘장미화가’란 애칭이 붙었다.

꽤 흐린 날씨였는데 섬은 희게 빛나고 있었다. ‘아야진’이라는 어여쁜 이름을 가진 해변에서 구불구불 해안선을 따라 올라가다가 자작도 해변에서 만난 섬이었다. 인근 해변과 다르게 해무가 끼지 않아 푸른빛이 선명한 동해와 바다 위 작은 섬 백도가 어우러진 풍경이 여행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국화꽃 향기>의 소설가 김하인과 부인인 도예가 정재남이 세운 ‘김하인아트홀’이 있는 곳이다. 김하인아트홀에서는 누구든지 백도의 바다를 바라보며 쉬면서 책을 읽고 흙을 만지며 옷감에 물을 들일 수 있다.

“여기는 아내가 나고 자란 곳이고, 아내를 만나 사랑을 꽃피우고, 내 남루했던 서울살이 시절을 위로할 수 있었던 곳이에요. <국화꽃 향기>를 시작으로 소설가로 크게 도와준 곳이죠.” 소설가 김하인이 고성의 자작도 해변에 문화공간을 연 지 5년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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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인아트홀 지하층과 1층에서는 도예체험과 염색체험을 할 수 있다. 도예가 정재남이 평생 촌부로 살아온 지역 부녀자들에게 흙빚는 방법을 알려주는 공간이지만 일반인들도 체험해 볼 수 있다.

개인뿐 아니라 80명까지 단체 체험객을 맞이할 수 있는 공간에는 카페도 마련돼 있다.

2층 도서관에서는 바다를 바라보며 책을 읽을 수 있고, 3층에는 가족 단위 여행객을 위한 숙박시설이 마련돼 있다.

사랑에 대한 작가의 깊고 튼튼한 고찰 덕분에 강한 여운을 남기는 글을 읽고 공감했다는 독자가 많다. 백도 바다 위로 ‘감성소설’이라 할 만한 그의 작품이 있어 오늘도 잠 못 드는 밤을 보낼 이들의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이번 여행에서는 7번 국도만을 고집하지 않기로 했다. 가능한 바다와 가까운 해안도로를 굽이굽이 찾아다니며 ‘나만의 낭만가도’를 만들기 위해서다. 대포항에서 시작된 7번 국도는 속초시내를 관통한다. 근사한 송림에 둘러싸인 물 맑은 속초 해수욕장을 지나 동쪽으로 핸들을 꺾으면 청초호가 나온다. 속초 중앙시장과 속초시청을 지나면 동명항에 다다른다. 양식한 해산물은 취급하지 않는다는 동명항은 속초의 미식가들이 즐겨 찾는 맛 좋고 저렴한 횟집들이 몰려 있는 곳이다.

동명항 언저리 영금정과 등대 전망대에 이어지는 낭만가도는 영랑호까지 뻗어 간다. ‘영랑’이라는 이름의 화랑이 호수의 풍경에 반해 머물렀다는 영랑호는 둘레 8킬로미터, 넓이 36만평이 넘는 거대한 자연 호수다. 호숫가를 따라 자동차길이 나 있긴 하지만, 영랑호를 제대로 즐기려면 자전거를 타거나 걷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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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가지 테마로 나뉜 영랑호 둘레길 옆으로 햇볕 들지 않는 숲 터널과 신비로운 비경을 지닌 범바위, 이국적인 분위기 물씬 풍기는 별장들과 호수 위를 미끄러져 나아가는 카누들이 차례로 나타나 지루할 틈이 없다.

영랑호의 남동쪽에 있는 범바위에는 꼭 올라야 한다. 건너편에서 보면 웅크리고 앉은 호랑이의 형상을 닮아 범바위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범바위 위에 올라 영랑호를 내려다보면 제대로 된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속초의 마지막 항구인 장사항을 지나 화려한 펜션과 호텔들이 즐비한 봉포항에 들어서면, 여기서부터는 고성군이다. 관동8경의 하나이며 동해 일출 최고 명소로 꼽히는 청간정과 해안절벽 위 선경(仙境)이라 불리는 천학정을 차례로 지나면 스쿠버다이버들이 모이는 문암리 해변, 백도 해변, 자작도 해변이 이어진다.

캠핑이 유행인 요즘 백도 해변은 인근 송지호오토캠핑장과 함께 찾는 사람이 날로 늘어나는 곳이다. 샤워시설, 식수대 등 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있고 깨끗하고 넓은 백사장이 있어 아이들이 놀기에도 좋다.

가리비 주산지인 오호항을 지나 계속 북쪽으로 올라가면 물회로유명한 가진항이 나타났다가 거진항을 만난다. 거진항은 고성에서 가장 크고 번화한 항구다. 명태잡이가 전성기를 맞았을 때, 동네 개들도 만원짜리 지폐를 입에 물고 다녔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로 번성했던 곳이다. 지금이야 동해에서 명태가 자취를 감춰 예전만큼 북적이지 않지만, 대신 서정적인 항구의 정취가 남아 있다.

해 질 무렵 거진 앞바다로 흘러내리는 붉은 노을을 가르며 집어등을 켠 오징어잡이 선단이 출격하는 모습은 감동적이다. 선한 눈빛의 바닷새들이 배 꽁무니를 쫓아 일제히 날아오르는 광경을 보노라면 중력을 잊고 날아오르고 싶은 마음마저 들게 하는 곳이 바로 거진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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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진항 북쪽으로 남한의 최북단 항구인 대진항이 있다. 거진항보다 규모는 작지만 활기찬 분위기다. 최전방에 있는 포구라지만 평화롭고 나른한 분위기가 여행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떠나기 아쉬운 마음을 포구 한쪽에 단단히 묶어 둔 채 다시 길을 나선다.

곧 화진포 호수에 닿는다. 이번 여행의 종착지다. 화진포 호수는 바다에서 밀려온 퇴적물에 의해 바다의 일부가 막혀 생겨난 호수다.

염분이 높아 한겨울에도 물이 얼지 않아 철새들이 머물렀다 가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화진포 호수 북쪽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별장에서 시작해 동쪽 호수길을 따라 찻골마을까지 이어지는 3킬로미터의 산소길은 일부러 시간을 내 걸어볼 만하다. 이기붕 부통령의 별장과 김일성의 별장이었다던 화진포 성을 둘러볼 수도 있다.

산소길의 끝자락 찻골마을길로 들어서면 자동차 소음 없는 호젓한 시간이 시작된다. 소나무 숲이 뿜어 내는 은은한 나무 향과 나지막하게 우는 새소리, 호수의 수면을 스치고 불어오는 기분 좋은 바람과 간간이 물고기 참방이는 명랑한 소리에 기쁜 마음이다.

걸어야 할 길이 끝나는 게 아쉬울 정도로 말이다.

글·고선영 (여행작가) / 사진·김형호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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