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문화/생활

암과 싸우며 소외된 이웃에 ‘슈바이처 인술’

암과싸우며

 

최윤근(66) 박사를 만난 곳은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 자리 잡고 있는 ‘최윤근통증클리닉’에서였다. 차의과학대학(전 포천중문의대)에서 퇴직한 후 9년 전 이곳에 개원했다. 마지막 진료를 끝내고 마주앉은 그에게 수상소감을 물었다. 그는 한참을 망설이더니 “상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선 대통령표창을 받는다니 굉장한 영광이지요.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혼자 한 일이 아닌데 저만 주목받는 것 같아 미안한 생각이 들었어요.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지 저보다 몇 배나 훌륭한 분들이 많은데 이런 큰 상을 받아도 되나 싶어 부끄럽기도 했고요.

하지만 무료진료소에서 묵묵히 일하고 있는 고마운 의사들, 차의과학대학 학생들, 자원봉사자들을 대표해서 받는 것이라고 정리하니 마음이 좀 가벼워졌어요. 이들이 아니었다면 시작도 할 수 없었고,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습니다. 그리고 누군지 모르겠지만 추천해 주신 분에게도 감사드립니다.”

암과1

동료들이
최 박사는 함께해 준 동료들이 있어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했다. “아이디어는 내가 냈지만 이들이 없었다면 시작도 할 수 없었을 것이고, 10년 동안 한결같이 유지할 수도 없었을 것”이라며 그들에게 모든 공을 돌렸다.

그가 분당보건소 내에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무료진료소를 만든 것은 2002년 1월. 당시 차의과학대학교 교수이자 차병원 통증센터 소장이었던 그는 10여 명의 후배 전문의와 차의과학대에 재학중인 의대생·간호대생을 포함, 1백여 명의 의료진을 구성해 진료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찾는 사람이 별로 없었지만 금방 입소문이나 매주 기하급수적으로 환자가 늘었다. 지금은 연간 4만여 명이 다녀간다.

무료진료소는 일주일에 한 번, 매주 일요일에 문을 연다. 연말연시, 명절을 제외하고는 쉬는 날도 없다. 봉사에 참여하고 있는 의사들의 전공과목이 다양해 ‘종합병원’ 수준의 진료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실제로 한 번에 여러 과목 진료를 받고 가는 환자들도 있다.

안과 장비들을 갖추고 있어 무료진료소 안에서 백내장 수술이 가능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다른 병원과 연계해 자기공명영상진단(MRI) 같은 고가의 검사도 받을 수 있게 해 준다. 수술이나 입원을 해야 하는 환자들은 사회복지단체의 후원이나 대형 병원의 도움을 받는다. 하지만 어느 정도 감면해 주는 정도일 뿐 전액 무료가 아니기 때문에 열악한 재정이 현재 무료진료소가 안고 있는 가장 큰 어려움이다.

암과2

미불법체류
“법인화가 되면 후원금 모금에 좀 도움이 될까 해서 추진을 했는데 요건이나 과정이 너무 복잡해서 결국 포기했습니다. 그 일에만 매달릴 수도 없고요. 그러나 재원이 너무 없어 사실 걱정이 많이 됩니다.

그 와중에도 다행인 것은 성남시청으로부터 연간 1천2백만원 상당의 약을 지원받고 있어요. 그게 아주 큰 힘이죠.”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그는 군의관으로 군복무를 마친 직후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수련의·전공의 과정을 거쳐 전문의가 되었고, 20년간 생활하다 1994년 귀국했다. 미국에서도 그는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미국에 거주하고 있던 동포들을 위해 무료 진료를 했다. 의료비가 우리나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싼 미국에서, 그것도 불법체류자가 병원에 가는 일은 꿈도 꿀 수 없는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그는 말없이 인술을 베풀었다. 온갖 허드렛일을 하느라 여러 가지 병을 달고 살고, 그로 인한 통증에 시달리고 있으면서도 아프다는 하소연조차 할 수 없었던 교포들은 그를 만나 마음의 상처까지 치유받곤 했다.

“그때의 경험이 무료진료소를 내게 된 계기입니다. 우리나라에 돌아와 보니 미국에서 당시 불법체류 교포들이 겪고 있는 것과 똑같은 고통을 외국인 노동자들이 겪고 있더라고요.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국 땅에 온 그들이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누리도록 돕는 것이 의사로서 제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이런 뜻을 친분이 있는 고등학교, 대학교 후배 의사들에게 전했더니 다들 흔쾌히 동의해 주어 큰 어려움 없이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변화가 없었는지를 묻자 그는 “무료진료소를 찾는 환자들의 국적이 많이 바뀌었다”고 답했다. 초기에는 네팔, 방글라데시, 필리핀, 몽골, 스리랑카 등 출신 지역이 다양했는데 몇 년 전부터는 중국 동포들이 주를 이룬다는 것. 그는 “불법체류자 일제 단속 이후 많은 수가 고국으로 돌아갔고, 고용주가 건강보험에 가입해 주는 경우가 늘어 생긴 현상인 것 같다”고 추측했다.

그동안 개인적인 위기도 있었다. 2008년 그는 전립선암 진단을 받아 큰 수술을 여섯 차례나 받았다. 예후가 좋지 않아 후유증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여전히 병원에서 환자들을 만나고 일요일엔 무료진료소로 출근한다.

70세이후
그는 골프도 치지 않고 특별한 취미도 없다. 그저 만보계를 허리에 차고 하루 만 보 이상 걷는 것으로 건강을 관리한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때문에 하루 목표량은 훌쩍 넘긴다. 그는 “의사이기 때문에 70세, 80세가 되어도 진료할 수 있으니 행복하고 무료진료를 통해 내가 가진 재능을 어려운 이웃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어 즐겁다”며 활짝 웃었다.

“등산, 운동, 여행 등 각자 자신의 삶을 즐기는 방법이 다른 것처럼 저는 제 일과 봉사를 통해 인생의 즐거움과 보람을 느낍니다.

그래서 가급적 오래 진료를 하고 싶어요. 통증의학은 손이 많이 가는 분야라 체력적으로 부담이 돼 70세 정도까지만 할 생각이고, 건강이 허락한다면 그 이후에는 저를 필요로 하는 곳에 가서 봉사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글·최선희 객원기자



지금 정책주간지 'K-공감' 뉴스레터를 구독하시고,
이메일로 다양한 소식을 받아보세요.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