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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겸손으로 ‘신분의 벽’을 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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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big‘서얼’이란, 첩의 자식인 ‘서자’와 ‘얼자’를 말한다. 여기서 첩의 신분이 양인이면 ‘서자’가 되고, 첩의 신분이 천인이면 ‘얼자’가 된다.

조선시대는 서자에게도 벼슬의 문호를 막고 있었으니 얼자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얼자이면서도 판서를 거쳐 정승의 문턱까지 올랐던 인물이 조선시대에 있었다. 반석평이 바로 그 인물이다.

반석평(潘碩枰·?~1540)은 시골 출신의 얼자였다. 실록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석평은 천얼(賤孼) 출신으로 시골에 살았는데 그가 학문에 뜻을 두고 있음을 그 조모가 알고서 천얼임을 숨기고 가문을 일으키고자 그 손자를 이끌고 서울로 와서 셋집에 살면서 길쌈과 바느질로 생계를 이어 가며 공부를 가르쳤다. 드디어 과거에 급제하여 중앙과 지방의 관직을 두루 거쳐 마침내 지위가 판서에 오르니 사람들이 그 조모를 현명하게 여겼다.”

그렇다고 과거 급제 후에도 이 같은 신분을 은폐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진급의 고비고비마다 출신 성분이 문제가 됐지만 워낙 바르고 겸손하며 청렴했던 처신으로 인해 위기를 넘어설 수 있었다.

반석평은 무인기질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그는 문과 급제 이후 줄곧 함경도 쪽 방어를 맡는 관직에 있었다. 거기에는 출신 성분도 감안됐을 것이다. 그러나 점차 그의 명쾌한 일처리 능력이 조정에도 알려지고 중종은 특히 반석평을 아끼고 보호해 주었다. 그래서 1530년에는 특진관에 보임되어 임금과 조정 대신들이 학문과 정치를 논하는 경연에도 참석할 수 있게 되었다.

이어 중종은 반석평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평안도 관찰사로 연이어 임명한다. 한 번도 아니고 네 차례나 관찰사를 지냈다는 것은 그에 대한 중종의 신임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증거다.

중종은 오랜 북방 및 지방생활을 해 온 반석평을 중용하기 위해 공조판서로 임명하자 신하들이 ‘중앙관리의 경력이 없다’는 이유로 거세게 반대해 일단 공조참판에 제수한다. 이후 형조참판 한성부판윤을 거쳐 마침내 반석평은 형조판서에 오른다. 이때도 조정 일각에서는 전임 형조판서의 재임기간이 얼마되지 않았는데 교체를 하게 될 경우 재판의 일관성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논리로 반대했지만 중종은 묵살했다.

이 무렵 반석평의 겸손한 성품을 보여주는 일화가 전한다. 정작 그가 종살이를 했던 주인집의 아들들이 현달하지 못하자 반석평은 중종에게 글을 올려 자신의 벼슬을 깎아서 그만큼 주인집 아들들에게 줄 수는 없겠느냐고 호소를 했다. 이에 중종은 그 뜻을 가상히 여겨 반석평의 벼슬은 그대로 둔 채 주인집 아들들의 벼슬을 높여 주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반석평의 겸손한 성품은 다음과 같은 일화에서 극적으로 드러난다. 그는 형조판서를 마치고 의정부 좌참찬에까지 올랐다. 이는 곧 정승에 오르는 전단계까지 승진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반석평이 하루는 길을 가다가 반대편에서 오는 허름한 복장의 양반을 보고서 급히 수레에서 내려 엎드려 절을 했다. 과거 주인집 아들이었던 것이다.

이 같은 겸손이 없었다면 과연 그가 저리 높이 올라갈 수 있었을까? 조모의 덕도 있고 머리 덕도 있었겠지만 결국 반석평의 현달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본인의 겸양하는 태도일 것이다.

글·이한우 (조선일보 기획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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