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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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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박순(朴淳·1523~1589)은 명종8년(1553)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들어서서 선조12년(1579)에 영의정에 오르는 등 파란만장한 벼슬길을 살다 간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서열상으로 자신보다 아래인 율곡 이이를 비롯해 서인의 바람막이 역할에 그쳐 크게 이름을 떨치지는 못했다.

장원급제자답게 진급은 순조로웠다. 그러나 홍문관 수찬과 교리, 의정부 사인(지금의 총리 비서실장) 등을 거쳐 명종16년(1561) 홍문관 응교로 있을 때 첫 시련을 맞게 된다. 당대 최고 실력자인 윤원형에게 맞서다가 관직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워낙 실력이 출중했기 때문에 이듬해 복직하여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여 명종20년(1565)에는 사간원 책임자인 대사간이 되어 문제의 윤원형을 탄핵하는 데 앞장서 윤원형 일당 제거에 큰 공을 세우게 된다.

그러나 정객으로서 박순의 행보에 주목해야 하는 것은 선조가 즉위한 이후부터다. 박순은 줄곧 사림들을 옹호하는 입장을 견지했다.

선조2년(1569)이 갈림길이었다. 이때 사림들이 다시 결집하고 있었다. 반(反)왕권 노선이 기묘사화 이후 다시 움직임을 시작한 것이다. 반면 김개를 비롯한 왕권 노선은 이들을 경계하였다. 그 타깃은 이이나 정철의 배후 역할을 하고 있던 박순이었다. 싸움은 사림 쪽의 승리로 끝이 났다. 당시 선조는 집권 2년차인 데다가 서손 출신 임금이라 정통성에 제약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일을 계기로 박순은 이이 등의 지지에 힘입어 이조판서에 오르며 장차 서인의 중추세력이 되는 인물들을 대거 발탁했다.

또 선조16년(1583) 이이가 병조판서로 있을 때 북방에서 침략의 조짐이 있어 조정이 급박하게 돌아갈 때였다. 하루는 임금이 북방의 일로 이이를 불러 이이가 급히 대궐로 들어가다가 갑자기 현기증이 일어나 제때 명을 받들지 못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에 사헌부 등에 포진해 있던 동인들이 이이를 몰아세웠다. 임금을 무시하는 죄를 범했다는 이유였다. 사실 이 문제는 서인들의 말대로 정말 이이가 현기증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인지 동인들의 지적대로 임금을 깔보는 마음에서 나왔는지를 확인할 길이 없다. 양쪽다 개연성이 있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건 이 일로 이이는 곤경에 처하게 됐다. 병조판서에서 물러나야 했고 박순은 정승이면서 병조판서를 겸직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때 박순은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이이를 변호했다. 결국 선조는 동인을 배척하고 박순과 이이의 손을 들어준다. 심지어 선조는 “나는 주자를 본받아 이이와 성혼의 당으로 들어가겠다”고까지 말한다. 정통성이 취약한 선조의 불가피한 선택이었는지 모른다.

이듬해 이이는 세상을 떠났고 박순은 고립무원의 지경에 놓인다.

조정은 동인의 이발(李潑)이 장악했다. 이발은 박순을 당파의 우두머리로 몰아세웠고 선조는 이발의 손을 들어 준다. 이에 박순은 낙향하여 은거생활에 들어갔다가 1589년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10년 이상 정승을 지낸 정치가 박순에 대한 평가는 당쟁 때문인지 그렇게 후하지 못하다. 반대파에서야 당연히 비판적이겠지만 서인들조차 박순의 역할은 주인공이 아니라 조연에 한정시켜 평가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주인공은 율곡 이이다.

글·이한우 (조선일보 기획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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