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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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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계탕의 역사는 생각보다 그리 길지 않다. 조선시대의 요리서에는 어디에도 삼계탕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 사정은 삼계탕의 옛 이름인 계삼탕으로 찾아봐도 마찬가지다. 삼계탕에 가까운 음식으로 눈에 뜨이는 것은 1795년의 <원행을묘정리의궤>에 올라 있는 진계백숙(陳鷄白熟)이다. 진계백숙은 묵은 닭을 맹물에 끓인 음식이다. 그러니 어린 닭을 쓰는 삼계탕과는 거리가 있다.

1800년대 말에 출간된 <시의전서>에 “좋은 연계를 백숙하여 건져서 뼈를 다 바르고 살을 뜯어서 육개장 하듯” 끓이는 연계국(계개장)이 등장한다. 연계(軟鷄)는 ‘병아리보다는 크지만 아직 살이 무른 햇닭’을 뜻하는 말로 요즘 흔히 쓰는 영계의 본딧말이다.

1917년에 출간된 요리연구가 방신영의 <조선요리제법>에는 닭의 뱃속에 찹쌀과 인삼가루를 넣고 끓이는 닭국이 보인다. 1924년에 초판이 나온 이용기의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 연계백숙이 출현하는데, 그 요리법의 말미에 “혹 인삼 먹는 이는 삼을 넣어 함께 고아도 매우 좋으니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런 음식들이 삼계탕의 뿌리가 아닐까 싶다.

계삼탕이라는 명칭은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하던 월간지 <조선>에서 발견된다. 이 잡지는 조선의 연중행사를 다루면서 더위가 오면 “부자들은 거의 매일 계삼탕을 복용한다”고 했다.

삼계탕이라는 이름은 1960년대에 들어서서 식당들이 쓰기 시작했는데, 아동문학가 조풍

연은 <서울잡학사전>에서 “계삼탕이 삼계탕으로 된 것은 인삼이 대중화되고 외국인들이 인삼의 가치를 인정하게 되자 삼을 위로 놓아 명칭을 간 것으로 여겨진다”고 했다. 삼계탕이라는 명칭은 순전히 외식업소들의 마케팅 전략으로 인해 생긴 셈이다.

따져 보면 인삼의 재배가 조선 중종 때 풍기군수로 있던 신재 주세붕에 의해 시작되었으므로 삼계탕의 역사는 그 이후부터로 유추할 수 있다. 게다가 지금같이 수삼을 넣는 삼계탕은 인삼의 냉장보관이 가능해진 1960년대에야 일반화될 수 있었을 것이다. 조풍연의 언급처럼 “과거에는 삼계탕이 여름에 개장 먹는 축보다는 여유 있는 집안의 시식”이었지만 인삼과 닭이 흔해진 지금은 사정이 바뀌어서 삼계탕이 더 대중적인 음식이 되었다.

최근 한 설문조사는 응답자의 약 70퍼센트가 올 여름 가장 먹고 싶은 보양식으로 삼계탕을 꼽았다고 밝힌 바 있다. 전통의 보양식인 보신탕을 선택한 사람들은 5퍼센트 남짓에 불과했으니 가히 삼계탕의 전성시대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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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요즈음 들어 삼계탕은 외국인들에게도 인기를 끌고 있다. 미식가로 알려진 일본작가 무라카미 류는 음식을 주제로한 에세이집 <달콤한 악마가 내 안으로 들어왔다>에서 삼계탕을 “펄펄 끓는 우윳빛 국물 속에 닭은 마치 거대한 바위산처럼 솟아올라 있다. 젓가락을 갖다 대면 껍질이 벗겨지고 살이 뼈에서 떨어져 나와 쫀득하고 하얀 덩어리로 변한 찹쌀과 함께 국물 속에 녹아든다. 봄에 녹아내리는 빙산처럼. 녹아내림이 그냥 그대로 행복으로 변해 버리는 추상물”이라고 묘사하면서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생명을 입속에 넣는 듯한 느낌을 준다”고 극찬한 바 있다.

중국의 유명배우 장쯔이와 영화감독 장이머우 또한 삼계탕 마니아임을 자처하며 최고의 음식이라고 치켜세울 정도이다. 그러나 일찍이 언론인 홍승면이 한탄한 것처럼 요즘은 재래종 닭을 쓰는 집이 드물어서 삼계탕 맛이 옛날 같지 않다.

그래도 3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서울 원효로의 강원정삼계탕과 인삼의 고장 경북 영주의 풍기삼계탕에 가면 정성으로 끓인 삼계탕을 맛볼 수 있다.

글·예종석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음식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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