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문화/생활

대동법 혁신 가능하게 한 건 소통




실록을 읽다 보면 왜 이런 뛰어난 인물들이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는지 의문의 드는 일이 하나둘이 아니다. 정승급만 놓고 봐도 태조 때의 조준, 태종 때의 하륜, 세종 때의 허조, 명종 때의 이준경, 그리고 지금 소개하게 될 인조·효종 때의 김육 등이 그렇다.

아마도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이 경세가보다는 학자들에게 관심을 쏟은 때문이 아닌가 한다. 조광조나 이황이나 이이는 경세 쪽으로는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했음에도 학계에서는 늘 이들에게만 조명이 집중된다.

조선 중기를 넘어서면서 당쟁에다 공리공담만이 난무하던 시절 김육(金堉·1580~1658)이라는 존재를 발견하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아! 이런 인물들이 있어 그래도 조선이 5백년 동안 버틸 수 있었구나.’

김육은 당파로 보면 그의 아버지가 이이의 제자이므로 서인이었다. 그래서 선조38년(1605년) 진사시에 급제해 성균관에서 공부했고 광해군3년(1611년)에 당시의 실력자 정인홍이 이황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리자 당파를 떠나 김육은 격분하여 정인홍의 이름을 유생들의 명부에서 삭제할 것을 주장하다가 성균관에서 쫓겨났다.

이후 김육은 경기도 가평에 은둔하여 직접 농사를 지으며 공부에 전념했다. 그에게 기회가 주어진 것은 인조반정으로 서인들이 권력을 장악하면서부터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늦은 마흔네 살 때인 인조2년 문과에 급제해 비로소 벼슬길에 들어섰다.

그의 대동법 시행 추진은 은둔 시절 직접 농사를 지으며 목격한 농민들의 비참한 생활상에 대한 분노에서 나온 것이다. 인조16년(1638년) 충청도 관찰사로 나간 김육은 도내의 토지대장과 세금징수 상황을 일일이 점검하고 그 과정에서 저질러지는 비리를 목격한 다음 본격적으로 대동법 추진에 들어간다.

1646년에는 소현세자의 부인 강빈을 처벌하려 할 때 이에 반대하다가 인조의 노여움을 사 자리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그러나 효종의 총애에 힘입어 마침내 1652년 좌의정에 오르고 이때 충청도에 이어 전라도에서도 대동법을 시행했다.

사실 대동법에 대한 양반이나 중간관리들의 거부감은 대단했다.

임금조차도 전국적 실시를 망설일 정도로 기득권층의 반감이 거셌던 대동법이다. 그럼에도 그는 좌의정과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제1의 사업으로 대동법 추진을 꼽았다.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대동법 이야기만 꺼내니 사람들이 웃을 만도 하다.”

그러나 이런 경세가로서의 김육에 대한 효종과 현종의 총애는 대단했다. 김육은 대동법에 그치지 않고 화폐유통을 역설했다. 이 또한 백성들의 실질적인 삶을 개선하기 위한 개혁정책의 하나였다.

사실 화폐유통은 태종이나 세종도 추진했으나 결국은 실패한 난제 중의 난제였다.

그가 이토록 열망했던 화폐유통은 그의 외증손자인 숙종이 마침내 실현하게 된다. 그에게는 두 아들 김좌명과 김우명이 있었는데 김우명의 딸이 현종비로 숙종의 어머니다. 또 김좌명의 아들 김석주는 숙종 초기 10년간 숙종을 곁에서 보좌하면서 정치의 기본을 가르쳤다.

글·이한우 (조선일보 기획취재부장) 



지금 정책주간지 'K-공감' 뉴스레터를 구독하시고,
이메일로 다양한 소식을 받아보세요.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