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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오는 3월 31일 스님의 생가를 복원해 세워진 산청 겁외사를 시작으로 스님이 평생 수행하셨던 인연처 24곳을 매달 순례하는 ‘영원한 자유인 성철 큰스님 수행도량 순례’를 시작한다. 장마철과 혹한기를 빼고 2014년 8월까지 스님의 수행처를 연대기 순으로 좇으며 진행하는 대장정이다.

스님이 머리를 깎기 전 참선을 시작해 40여 일 만에 동정일여(動靜一如)의 경지에 들었던 산청 대원사(4월), 스님의 출가 본사인 합천 해인사(5월)가 출발점. 대구 동화사(9월)는 스님이 깨달음을 얻어 ‘(…) 문득 한 번 웃고 머리를 돌려 서니/ 청산은 예대로 흰 구름 속에 섰네’라는 오도송을 읊었던 곳이다.

문경 대승사 윤필암(2013년 6월)은 한국 현대불교사에서 또 한 분의 큰 스승이기도 한 청담 스님의 딸 묘엄 스님을 성철 스님이 직접 거둬 출가시켰던 인연처다.




성철 스님은 청담 스님에 대해 “청담과 나 사이에는 물을 부어도 한 방울 안 샐 만큼 딱 붙은 사이”라고 했고, 청담스님은 성철 스님에 대해 “성철은 팔만대장경을 다 줘도 안 바꾼다”고 했을 만큼 두 어른은 둘도 없는 평생 도반이었다.

또 청정승가 중심의 현재 한국불교 문화의 기틀을 놓은 ‘봉암사 결사’의 현장 문경 봉암사(2013년 7월)도 찾아간다. 현재 조계종 종립선원이 있는 봉암사는 부처님오신날 외에는 산문을 닫아 걸고 수좌 스님들만 거처하며 용맹정진하는 곳이다.

순례는 스님이 10년간 ‘장좌불와(長座不臥)’, ‘동구불출(洞口不出)’하며 용맹정진했던 대구 파계사 성전암(2014년 4월) 등을 거쳐, 스님이 1966년 이후 1993년 열반에 들 때까지 머물렀던 합천 해인사 백련암(8월)에서 마침표를 찍게 된다.

스님이 멀리 고향에서 찾아온 모친마저 보지 않겠다고 하다 다른 스님들에게 ‘어머니를 모시고 금강산 구경을 시켜드리든지 아니면 짐 싸서 나가라’는 말을 듣고서야 어머니를 모시고 금강산을 둘러봤다는 일화로 유명한 ‘금강산 마하연’도 순례 일정에 들어 있다. 다만 남북관계 등 여러 변수가 있어 일정은 아직 확정되지 않은 상태다.

내달 5일부터는 매주 월요일 저녁 7시 서울 견지동 전법회관 선운당에서 ‘백일법문 강좌’도 열린다. 총 12강. 성철 스님이 1967년 해인총림 초대 방장에 취임한 뒤 동안거를 맞아 총림대중들에게 매일 설법했던 백일법문의 뜻을 되새기는 자리다. 원택 스님, 동국대 김성철 교수, 불광연구원 서재영 박사 등이 강사로 나서 불교의 본질과 중도사상, 중관, 유식, 천태, 화엄, 선종사상 등 백일법문 전체를 강의한다.

성철 스님 탄신일인 오는 3월 11일에는 서울 견지동 조계사에서 탄신 1백주년 다례재가 치러진다. 이에 앞서 9일부터 6월 3일까지는 조계종 불교중앙박물관에서 성철 스님의 유품과 유필, 사진, 동영상 콘텐츠 등을 선보이는 성철 스님 생애 특별전 <자기를 바로봅시다>도 열린다.

또 지난해부터 시작된 ‘퇴옹 성철의 1백년과 한국불교의 1백년’ 학술 포럼은 올해 ‘퇴옹 성철과 한국불교’를 소주제로 네차례 열린다. 장소는 서울 견지동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지하 공연장.


또 스님의 생애를 담은 <성철 큰스님 행장>, 말씀에 사진을 곁들인 <본래 눈을 뜨고 보면> 등 서적도 출간된다. 스님의 일화를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춘 동화도 가을쯤 선보인다.

성철 스님은 생전에 “누구도 법당에서 정성을 다해 3천배(拜)를 마치지 않고서는 날 만날 생각을 마라.”고 강조해 말씀하셨다. 성철 스님의 상좌로 입적 때까지 20년간 시봉했던 원택 스님은 “성철스님의 ‘3천배 요구’는 청정한 수행자의 모습을 지켜내기 위한 철벽과 같았다. 권력(權力)·금력(金力)으로부터 자유로운 모습으로 모든 출가자에게 본을 보이신 것”이라고 설명했다. ‘성철 리더십’이다.

성철 스님의 ‘3천배 요구’ 때문에 스님의 명성을 좇아 왔던 숱한 권력자와 재력가들은 모두 발길을 돌렸다.

1978년 구마고속도로 개통 때는 박정희 대통령이 당시 경남 합천의 가야산 해인사를 방문했지만 방장이던 성철 스님은 만나지 못했다. 원택 스님은 “서슬퍼런 유신시절 박 대통령의 만남 요청을 거절한다는 것 자체가 비범한 용기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회상했다. 선방 수좌들은 정치권력을 두려워하지 않는 성철 스님의 단호한 모습에서 수행자로서 자부심을 얻었다.


1980년대 초반에는 당시 사채업으로 큰 돈을 모았던 장영자씨 부부가 다른 스님들과 함께 스님을 찾아온 적도 있었다. 당시 주변에선 “장씨 부부를 한 번만 만나주면 대한민국 사찰불사(佛事)가 전부 다 해결된다”며 성철 스님을 졸랐다고 한다. 하지만 스님은 “그런 불사라면 내 안 할란다”라며 끝까지 굽히지 않았다.

성철 스님은 또 상좌들이 자신의 그늘에서 권력과 이권을 누릴 여지 자체를 없애버리는 모범도 보였다. 세속의 언어로 말하면 일종의 ‘친인척 관리’인 셈이다. 1967년 처음 해인사 방장으로 추대된 뒤 주지가 바뀔 때면 늘 직접 불러다 “내 상좌들에게는 절대 본·말사 주지나 삼직(총무·재무·교무 등 주요 보직)을 시키지 말라”고 ‘명령’했다.

해인사처럼 큰 사찰에서 혹시라도 방장 스님의 상좌라는 이유로 ‘실세’ 행세를 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원택 스님은 “상좌들 중에는 볼멘소리를 하는 이도 있었지만, 그 덕에 지금까지 상좌들이 큰 다툼 없이 원만하고 평안하게 살아온 것 같다”고도 했다.

글·이태훈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문의 불교인재원 www.injaewon.org ☎02-1661-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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