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풍차와 한바탕 결전을 치른 돈키호테가 초주검이 돼 드러누워 있다. 시종 산초가 돈키호테의 명에 따라 죽은 사람도 벌떡 일으킨다는 ‘신비의 명약’을 제조한다.
“냄비에 포도주 세 숟가락을 붓고, 후추 약간, 장미꽃 한 송이 그리고… 말린 뱀 혓바닥.”
순조롭던 ‘명약’ 제조는 갑자기 엉뚱한 재료가 튀어나오면서 우스꽝스러워진다. 대사를 알아들은 관객들의 웃음이 터지고 약 1초 뒤 무대 양쪽에 설치된 스크린에 ‘말린 뱀 혓바닥’이라는 자막이 뜨자 다른 관객들 사이에서 ‘까르르’ 하는 웃음이 터진다. 시간차가 존재하지만 한자리에서 같은 연극을 보며 즐거움을 나누는 것은 틀림없다.
명동예술극장과 신한카드 사회봉사팀 ‘아름人’이 준비한 이날 행사에는 청음회관, 삼성소리샘복지관, 삼성농아원, 시립대학종합사회복지관, 서부장애인복지회에서 온 2백여 명의 청각 장애인들과 자원봉사자, 신한카드 ‘아름人’ 팀원들이 참석했다.
대다수가 초중고생인 ‘특별 손님’들 중 상당수는 이번이 첫 연극 관람이었다. 무대 위 배우들의 연기는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었지만, ‘잘 들리지 않는’ 관객들을 위해 무대 양 옆에는 스크린이 설치됐다. 관객들은 배우의 연기를 보고 자막으로 대사를 읽으며 연극의 재미에 빠져들었다.
연극 <돈키호테>는 일흔일곱의 배우 이순재가 고령의 나이임에도 “이제 더 나이 들면 못 해볼 것 같아서”라며 연극무대에 올라 화제가 된 연극이다. 상연 시간은 중간 휴식시간을 포함해 2시간 40분. 아이들이 보기에는 조금 길지 않나 싶었지만 어린 관객들은 TV에서만 보던 이순재 할아버지가 눈앞에서 펼치는 무대 위 코믹 활극과 자막 스크린을 오가느라 지루해할 틈이 없었다.
청각장애를 겪고 있는 강건우(17) 학생은 “연극을 처음 봤는데 자막이 있어서 너무 좋았어요”라고 서툰 어조로 첫 연극 감상의 흥분을 전했다. 아이와 함께 왔다는 오현정 씨도 “‘와우(蝸牛)’ 같은 청각교정 수술을 받은 아이들은 실내에서의 작은 말소리는 들을 수 있지만 이렇게 넓은 데서 울리는 소리는 잘 못 듣는다. 하지만 자막 덕분에 감상에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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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각장애인들은 생활수준을 떠나 그동안 음악회나 연극 같은 문화공연 관람에서는 철저한 소외계층이었다. 간혹 수화로 사회를 보거나 내용 일부를 전달하는 공연은 있었으나 긴 대사 전체를 전달하지는 못해 청각장애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은 전체 공연 내용 중에서 매우 제한적이었다. 하지만 이번 공연에서는 자막을 통해 일반 관객과 큰 차이 없이 연극 내용을 즐길 수 있었다.
청각장애인들과 함께한 공연은 무대에 선 배우들에게도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돈키호테 역의 이순재 씨는 “불편을 겪고 있다고 해서 자질이나 소질이 없는 것은 아니다. 헬런 켈러나 스티븐 호킹 박사같이 장애를 극복하고 자기 소질을 잘 계발하는 경우도 있다”며 “우리 사회가 그런 것을 발견해주고 잘 키워주는 인프라가 아직 미흡해 기성세대로서 미안한 마음이지만 희망을 갖고 열심히 노력하길 바란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바람둥이 ‘돈 페르난도 공작’역을 맡은 한윤춘 씨도 “청각에 어려움이 있는 관객들이 온다고 들었다”며 “그런데 낮에 온 관객들보다 오히려 더 열린 마음으로 웃어줬다. 뜻깊은 공연이었다”고 말했다.
청각장애인들과 함께 연극을 관람한 관객들 중에는 직접 표를 구입한 일반 관객들도 있었다. 혹시 자막 스크린이 이들에게 불편을 주지는 않았을까. 데이트코스로 명동예술극장을 찾았다는 임현길(31) 씨는 “자막이 전혀 부담스럽지 않다”며 “청각장애인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공연 후에는 출연배우 전원이 로비에서 관객들과 인사하는 시간을 가졌다. 어린 관객들은 카메라를 꺼내들고 같이 기념촬영을 하기도 했고 ‘이순재 할아버지’에게 사인을 받으면서 수염이 진짜냐고 묻기도 했다.
글·남창희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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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