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사군자, 그중에서도 ‘난죽’은 일제 강점기에 특히 유행했다.
군자가 그리운 시대였기 때문일 게다. 오늘날이라고 다를까. 난죽은 세한의 계절에 더욱 가치를 발하는 우리 옛 그림의 표상이다.
서울 소격동 학고재갤러리 본관에서 <소호(小湖)와 해강(海岡)의 난죽(蘭竹)>전이 열리고 있다. 외면받는 고미술, 그중에서도 천덕꾸러기인 근대기 서화를 재조명하는 전시다. 예서·행서를 잘 썼던 소호 김응원(1855?921)은 대원군에게 쏟아지는 묵란도 청탁을 대신해 난을 쳤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해강 김규진(1868?933)은 굵은 왕죽을 당대에 유행시켰을 만큼 통죽에 빼어났다. 영친왕에게 서법을 가르쳤고, 창덕궁 희정당에 벽화를 그리기도 했다. 서화뿐 아니라 신문물에도 밝아 조선인으론 처음으로 사진관(‘천연당’)을 열었고, 어전(御殿) 사진사가 됐다.
한쪽으로 날리는 짧은 댓잎으로 세찬 바람의 기운을 드러내는 기법은 후대 화가들에게 폭넓게 영향을 미쳤다. 특히 젊은 시절 죽사(竹士)라는 호를 사용할 만큼 묵죽도를 잘 그렸던 이응노(1904?9)에게 계승됐다.
난은 조선 초엔 왕공사대부(王公士大夫)들이 간혹 그렸고, 18세기 이후 널리 유행했다. 19세기엔 추사(秋史) 김정희, 석파(石坡) 이하응(흥선대원군)이 묵란으로 이름을 날렸다. 당대의 풍운아 석파는 “십 년을 나갔다 물러났다 하기를 험한 산길처럼 살아왔다(進退十年羊九腸)”고 시를 지었다. 굴곡진 인생만큼이나 굵기와 농담의 변화가 역동적인 난을 즐겨 그렸다.
![]()
학고재 우찬규 대표는 “대원군의 난엔 인생의 응어리가 담겨 있다.
이 점이 석파란(대원군이 친 난초)을 조선왕조 통틀어 최고의 난으로 꼽게끔 한다. 예술엔 인생이 녹아 있는 것이다. 반면 소호의 난은 곱고 매끄럽다. 친일적 요소도 있다. 석파 같은 고난의 삶을 살지 않은 것, 그게 소호의 미덕이자 한계”라고 설명했다.
소호와 해강, 생소한 이름이다. 무리는 아니다. 전시를 통해 이들이 조명된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소호의 경우가 더하다.
두 사람 모두 서화에 뛰어났을 뿐 아니라 격동의 시대 서화학교 창설에 힘쓰는 등 후진을 양성하며, 전통의 현대화라는 화두를 치열히 고민한 인물이다.
전시작 34점 모두 이 화랑이 과거 일본 소장가에게서 일괄 구매한 것이다. 섬세하게 표구된 묵죽도 족자와 병풍, 혹은 투명 아크릴 박스 안에서 한층 모던한 묵란도가 한옥 서까래 밑에서 고고하다.
전시장엔 소호가 활달하게 행서로 옮겨 적은 이태백(701?62)의 칠언시 ‘대주문월(對酒問月)’도 걸려 있다. 그 내용은 이렇다.
“요즘 사람 옛적 달 못 보았으나, 요즘 달 옛 사람을 비추었으리. 옛 사람 요즘 사람 모두 흐르는 물 같으나, 달 보는 그 마음은 모두 같으리. 오직 바라는 건 술 마시고 노래할 때 달빛이 길이길이 금 술통 비추는 거라네.(今人不見古時月/ 今月曾經照古人/ 古人今人若流水/ 共看明月皆如此/ 唯願當歌對酒時/ 月光長照金樽裏)”
2012년 신년 벽두에, 19세기 말?0세기 초 서화를 찾아야 할 이유를 묻는다면, 전시장에 걸린 이백의 시에 그 답이 있다.
글·권근영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
일시 2월 19일까지
장소 학고재갤러리 본관
문의 ☎02-720-1524
관람료 무료
사군자(四君子)는 매난국죽(梅蘭菊竹)으로 선비정신의 상징이다. 19세기 문인화 부흥에 힘입어 화단의 주류로 떠올랐다. 사군자는 더러 서예의 연장선상으로 여겨지기도, 서화로 들어가는 입문과정으로 폄하되기도 한다. 그러나 여백과 흑백의 묘미를 살려 동양 회화의 가치와 정수를 담아낸 분야라 할 수 있다. 사군자 전문화가는 일제 강점기에 대거 등장했고, 작품 수도 크게 늘었다.
K-공감누리집의 콘텐츠 자료는 「공공누리 제4유형 : 출처표시 + 상업적 이용금지 + 변경금지」의 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합니다. 다만, 사진의 경우 제3자에게 저작권이 있으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콘텐츠 이용 시에는 출처를 반드시 표기해야 하며, 위반 시 저작권법 제37조 및 제138조에 따라 처벌될 수 있습니다.
[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