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심의겸(沈義謙·1535~1587)은 국사책에도 등장하는 조선 명종, 선조 연간의 인물로 붕당정치 서인의 대표주자다. 요즘도 실세(實勢)라는 말이 있지만 심의겸은 말 그대로 명종 말 선조 초 왕권에 버금하는 권력을 가진 최고의 실력자라고 할 수 있다. 이유는 단 하나. 명종비 인순왕후 심씨의 친동생이었기 때문이다.
명종 말 30대 초반의 심의겸 주변에는 ‘큰 뜻’을 품은 젊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이나 정철도 그들 중에 포함돼 있었다. 게다가 명종이 세상을 떠나면서 적통(嫡統)이 끊어지자 조선조 최초로 후궁의 손자가 왕위에 오르는 일이 발생했다.
당시 영의정 이준경의 추대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적통과 방계승통은 천지차이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당시 선조는 아직 10대였기 때문에 ‘대비’인 명종비 심씨의 수렴청정이 불가피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인물이 바로 심의겸이다.
심의겸은 왕실의 인척이지만 문과 급제자로서 젊은 사림들과 격의없이 어울렸다. 물론 그의 뿌리는 척신(戚臣)이다. 조정에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 수밖에 없었다. 후궁의 손자라도 임금으로 인정하자는 그룹과 겉으로 표현할 수 없지만 인정할 수 없다는 그룹이 내분을 겪는다. 이 두 그룹의 갈등이 최초로 표면화된 것이 1575년(선조 8년)이다. 역사책에서도 이때를 당쟁의 시발점으로 기록하고 있다.
하급관리의 인사권을 가진 이조정랑 자리를 두고서 심의겸과 김효원이 정면으로 충돌한 것이다. 이조정랑 김효원의 후임으로 심의겸의 아우 심충겸이 추천되자 김효원은 ‘정랑 자리가 척신의 사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며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이때부터 심의겸을 지지하는 이이, 정철, 윤두수, 김계휘 등은 서인으로 분류됐고, 김효원을 지지한 이발은 동인을 이끌며 두 당파는 사사건건 대립했다.
심의겸도 1580년 예조참판을 거쳐 함경도관찰사로 나가는 등 중앙과 외직을 오가며 승승장구하다가 동인(훗날의 북인)의 정인홍으로부터 탄핵을 받아 정치적 위기에 빠졌으며 결국 1584년 서인의 정치적 보루였던 이이가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동인 세상이 되자 관직에서 쫓겨났다. 그후 그는 파주에서 은거생활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실록은 그의 죽음에 관해 두 가지 기록을 남겼다. 동인과 북인이 집필한 ‘선조실록’은 짤막하게 심의겸이 죽었다는 사실만 전한다. 그러나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이 성공하자 서인들은 실록의 수정작업에 들어가 ‘선조수정실록’을 간행한다. 여기에는 완전히 다른 내용이 들어 있다.
“심의겸은 자신이 존귀한 (왕실의) 인척 자리에 있었으나 천성이 본디 엄하고 근신하여 밖으로는 조정관리들 가운데 선한 부류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이끌어주고 도와주었으며 안으로는 왕비(인순왕후)의 사적인 길을 막았으니 당시의 사림들이 높게 평가하였다.”
통상 이런 경우 그 인물의 실상은 두 극단적인 평가의 중간쯤에 있는 것으로 보면 크게 틀리지 않는다. 권력을 크게 누렸으니 시기질투도 컸으리라.
권력을 가진 자는 겸손하고 또 겸손해도 구설수에 오르는 것은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심의겸에서도 새삼 확인하게 된다.
글·이한우 (조선일보 기획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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