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1469년 11월 재위 1년2개월밖에 안된 예종이 급서했을 때 왕위계승 제1후보인 그의 외아들 제안대군(齊安大君·1466?525년)은 우리 나이로 네 살밖에 되지 않았다. 결국 왕위는 사촌형 잘산군(훗날의 성종)으로 넘어갔고 이후 제안대군은 숨죽이고 소리 없는 삶을 살아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성종이 그를 화근(禍根)으로 보지 않고 따뜻한 형제애로 감싸 안았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삶은 평탄할 수 없었고 특히 결혼생활에서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그는 열두 살이 됐을 때 궁궐의 미곡출납을 담당하는 사도시의 책임자 김수말의 딸과 결혼했다. 그런데 결혼 2년째인 1479년(성종10년) 뜬금없이 성종은 정승들에게 제안대군의 부인을 폐할 것을 명한다. 한마디로 강제 이혼시키라는 것이었다. 아무리 왕이 될 뻔했던 왕자라고는 하지만 일개 대군의 이혼문제를 국왕과 정승이 논의했다는 것은 뭔가 중대한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실록에 따르면 그 이유는 제안대군의 어머니인 인혜대비의 뜻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인혜대비는 ‘제안대군의 부인이 갑자기 졸도하는 등 병이 깊어 간절히 기다리는 손자를 볼 수 없을 것 같아 이혼을 원한다’고 했다. 이는 소위 칠거지악 중에서 ‘나쁜 병(惡疾)’에 해당되는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성종의 어머니 인수대비는 며느리 윤씨를 폐비시켰고 인혜대비는 김씨를 폐하려 한 것이다.
김씨의 외가는 세조의 즉위에 공을 세운 공신 집안이었다. 외할아버지 유수가 직접 나서 ‘자식을 못 낳는다는 이유로 내치면 모르지만 악질이 있어 내치는 것은 실상과 다르다’며 성종에게 직접 호소를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힘없는 제안대군은 결국 1481년(성종12년) 평양군 박중선의 딸과 ‘강제’ 재혼을 한다. 박중선은 한명회를 따르던 사람이었다. 성종을 옹립한 한명회 등 훈구세력들은 장차 제안대군의 재기를 근원적으로 막기 위해 자기들 사람인 박중선의 딸을 이용한 것이다.
열여섯 살 제안대군은 정치적 사안은 양보할 수 있지만 개인사는 물러설 의사가 전혀 없었다. 이듬해 6월 조정에서는 제안대군이 이혼한 부인과 다시 살고 있다며 처벌 논의가 격렬하게 벌어진다.
그러자 제안대군도 강수로 맞선다. 부인 박씨가 몸종 금음물과 동침을 했다는 것이다. 세종의 며느리 봉씨 이후 조선왕실에서 두번째로 레즈비언 파동이 터졌다. 논란 끝에 사건은 몸종이 박씨를 무고한 것으로 정리돼 끝났고 결국 금음물은 사형을 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제안대군과 박씨는 제대로 살 수가 없었다. 결국 3년 후인 1485년 스무 살의 제안대군은 성종의 재가를 얻어 김씨와 재결합을 한다. 이를 복합(複合)이라고 한다. 강제 이혼당한 박씨는 얼마 후 세상을 떠났다.
이후 제안대군은 연산군이 쫓겨나고 중종이 반정으로 왕위에 오르는 격동을 다 지켜보았고 중종 20년 60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 격동의 정치를 지켜보면서 그는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다행으로 여겼을까, 여전히 아쉬움을 가졌을까?
조선 명종 때의 학자 어숙권이 쓴 <패관잡기(稗官雜記)>에는 그를 평하여 ‘성품이 어리석다’고 하면서도 ‘진실로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몸을 보전하기 위하여 스스로를 감춘 것’이라고 하고 있다.
글·이한우 (조선일보 기획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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