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이름난 소설가의 에세이를 읽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좋은 소설가라면 자신이 해야 할 모든 말을 소설에 쏟아놓았을 터. 만약 다른 글로 이를 보충해야 한다면 그의 소설은 그만큼 함량미달이라는 말이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소설가가 에세이를 쓰고, 독자들은 그의 에세이를 즐겨 찾아 읽는다. 아마도 독자 처지에서 보자면 작가의 소소한 일상과 소설 창작에 얽힌 일화를 듣고 싶어서 에세이를 읽을 공산이 크고, 작가 처지에서는 소설이라는 그릇에 담을 수 없는 내용을 썼으리라. 명성이 자자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잡문집>은 소설가가 에세이를 왜 쓰는지, 그리고 독자는 왜 읽는지 그 이유를 잘 보여주는 좋은 책이다.
일단 <잡문집>을 읽다 보면 무라카미 하루키가 무척 겸손하다는 생각이 들어 기분 좋다. 자기를 추켜세우는 대목을 발견할 수 없는 데다 일종의 ‘루저’ 생활 끝에 우연히 소설가가 되었다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약간 놀랄 정도다. 전세계 40개 이상의 언어로 50편 이상의 작품이 번역된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존경할 만한 태도다. 번역문이라 함부로 말할 수는 없지만 감정과잉이 없다는 점도 높이 살 만하다. 어쩌면 건조하기까지 한 문체로 글을 쓰고 있는데 밑줄 칠 만한 구절이 꼭 나온다. 아마도 사유의 힘 덕분이 아닐까 싶다.
내가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며 읽은 부분은 번역에 대한 것과 그의 작품 <언더그라운드>에 얽힌 일화를 기록한 부분이다. 알려져 있다시피 무라카미 하루키는 영어작품을 일본어로 번역하는 일을 한다.
쓰는 일이 본업이다 보니 번역할 적에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고르게 마련이니 하루키가 번역한 작품은 기실 그의 문학세계의 자양분이 무엇인지 잘 드러낸다. 다른 데서도 읽은 기억이 나는데, 하루키는 <호밀밭의 파수꾼>과 <위대한 개츠비>를 상당히 높이 평가하고 이 작품들을 번역했다. 나는 이 사실이 하루키 소설세계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열쇠 역할을 한다고 여긴다. 그는 세계문학에 대한 폭넓은 영향을 받았다기보다는 미국 소설에 강한 자극을 받았고, 특별히 성장소설을 좋아한다. <노르웨이의 숲>이나 <해변의 카프카>가 성장소설이라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나는 하루키가 역사나 사회에서 한 발 물러나 개인에 초점을 맞춘, 일정 부분 미성숙한 의식의 작가로 생각해 왔다. 그런데 옴진리교 사건을 다룬 <언더그라운드>에 관한 일화를 읽으면서 생각을 완전히 바꾸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루키도 역사나 사회성에 눈을 뜬 성숙한 작가의 면모를 띠게 된 것이다. 1995년 지하철에 독가스를 살포해 무고한 시민들을 사상케 한 사건을 다루면서 하루키는 일본사회의 문제점을 예리하게 파헤친다.![]()
이 사건이 터지게 된 배경으로 하루키는 ‘사회 자체가 목적을 상실’한 것을 꼽았다. 일본사회가 어느덧 “전후 오십년간 그토록 열심히 일하고 끊임없이 물질적인 풍요함을 추구한 결과 우리는 지금 어디에 도달했는가? 우리 사회가 최종적으로 지향하는 곳은 과연 어디인가?” 하는 의문에 빠졌다는 것이다.
하루키는 옴진리교 관련자들한테 공통질문을 하나 던졌다. “당신은 사춘기때 소설을 열심히 읽었습니까?”라고. 대답은 한결같이 “아니오”였다고 한다. 이 점을 주목하며 하루키는 말한다.
“그들은 이야기라는 것의 성립방식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잘 아시겠지만, 여러 갈래의 다른 이야기들을 경험해 온 인간은 픽션과 실제 현실 사이의 선을 자연스레 찾아낸다. 또한 ‘이건 좋은 이야기다’ ‘이건 그다지 좋은 이야기가 못 된다’고 판단해 낸다. 그러나 옴진리교에 이끌린 사람들은 그 중요한 선을 제대로 읽어 낼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픽션이 본래적으로 발휘하는 작용에 대한 면역성을 갖추지 못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 시대, 우리가 왜 소설을 읽고 책을 읽어야 하는지 일깨워 주는 전율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글·이권우 (도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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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