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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예술 대신 예능으로 몰리는 이유




평론가들의 불만은 이렇다. “세상이 자극적인 것만 좋아하고 비평을 외면한다. 천박하다. 온 세상이 강호동, 유재석이 찧고 까부는 것만 봐서야 되겠느냐. 무용, 연극, 클래식, 문학…. 신문에 전문 비평가들의 목소리가 나와야 한다. 그것도 자주.”

일리가 있다. 그래서 본격 ‘리뷰’를 부탁한다. 우리 기자가 평론가와 통화한 내용은 이렇다.

“○○○ 선생님 작품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직 멀었지요. 너무 경박하고…. 아직 멀었는데, 벌써 거장인 척 하지 않습니까.”
“네, 그러면 뭐가 부족한지 구체적으로 써 주세요.”
“….”

엄밀히 말하면 평론가들이 원한 것은 쓴 건 쓰다고 단 것은 달다고 쓰는 본격 ‘리뷰’가 아니라 주례사 비평을 쓸 지면이었다. ‘주례사 비평’이란 좋으면 좋다고, 나빠도 좋다고 쓰는 평론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남의 지면을 빌려 예술가들에게 아부하는 것이다. (물론 모든 평론가가 다 그런 것은 결코 아니다.) 비평 대상자의 이름이 크면 클수록 평론가들의 배짱은 쪼그라든다.

왜 이 지경이 됐을까. 비평이 설 자리를 잃은 게 첫째 이유다. 비평이 읽을 맛이 없어서 독자들이 평론지를 찾지 않는지, 평론지가 사라져 볼 만한 평론가가 사라졌는지, 무엇이 우선인지는 명확지 않다. 그러나 평론지가 독자들의 주머니를 열게 하는 데 실패한 것만은 확실하다.

마당을 잃은 평론가들은 ‘홍보지’로 자리를 옮겼다. 요즘 우리 문화계에는 본격 평론지는 사라지고 홍보잡지를 겸한 묘한 형태의 문화행사 소개지가 절대다수다.

여기에 ‘생계’ 문제가 개입된다. ‘유력 필자’, ‘저명 음악가’, ‘유명 화가’, ‘유명 출판사’는 문화잡지를, 문화비평지를, 문화행사를, 관련 포럼을 ‘지배’한다. 먹고 살기 힘든 지식인 평론가들은 그들이 주인인 ‘밥통’에 숟가락을 들이밀어야 한다. 그 지배자들은 비평을 가장한 아첨을 원할 뿐, 비평 자체를 혐오한다. ‘연극계 ○○○ 눈에 밉보이면 밥 먹기 힘들다’, ‘클래식계에서 ○○○에게 밉보이면 더 이상 글쓰기 힘들 것’ 이런 소문이 파다하니 평론가들은 ‘매운’ 리뷰를 쓰지 못한다. 평가자(평론가)가 피평가자(실연자)보다 힘이 약하니 벌어지는 일이다. 기자들에게 ‘나는 쓰지 못하겠으니 당신이 대신 써달라’ 부탁하는 평론가도 있다.




외국 신문을 자주 읽는 이들은 왜 우리 비평이 신랄하지 못한가 타박한다. “이 영화를 보면 가까운 경찰에 신고하라”(로베르토 베니니의 피노키오), “이 영화에서 가장 눈물 나는 대목은 제임스 캐머런 감독이 자기 능력으로 시나리오를 쓰겠다 우긴 것”(타이타닉), “1조 달러짜리 특수효과에 25센트짜리 이야기”(스파이더맨) 같은 것 말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의 ‘거장’들이 평론가의 이런 리뷰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러나 비평은 가치 없는 작품에는 눈길을 주지 않는다. 비평이란 ‘완벽’이란 이룰 수 없는 꿈에 대한 도전이다. 그건 예술의 궁극과도 통한다. 예술가들에게 평론가란 ‘적(敵)인 척하는 친구’다. 친구에게 아부만을 권하는 우리 거장들. 문제는 오고가는 아부 속에 관객은 유재석과 강호동의 품으로 떠나고 있다는 것이다.

글·박은주 (조선일보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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