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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조선시대 때 정승들은 사람을 알아보는 달인이었다. 그들은 종종 신진관리를 보게 되면 ‘저놈 정승감이다’, ‘저놈 판서감이다’는 등의 평을 하곤 했는데 아무래도 판서감보다는 정승감이라고 하는 것이 훨씬 좋은 평이었다.

우리가 흔히 강직함의 대명사처럼 여기는 김종서(金宗瑞·1383~1453)의 경우 잘 들여다보면 정승감으로는 조금 문제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강직함의 도가 조금은 지나쳤기 때문이다.

이 점을 일찍 간파했던 사람이 있었으니 조선 최고의 3대 정승 중 한 명으로 꼽히는 황희(黃喜)가 바로 그였다.

한번은 공조판서로 있던 김종서가 황희를 비롯한 정승들을 공적으로 접대할 일이 있었다. 이때 김종서는 공조에서 술과 과일을 준비시켰다가 황희에게 혼쭐이 난다. “국가에서 예빈시(국빈을 대접하거나 종실 및 정승들의 음식물 공급 등을 관장하는 기관)를 의정부 옆에 둔 까닭은 3정승을 대접하라는 것인데 어찌 공조가 사사로이 음식을 장만할 수 있단 말이냐.” 평소의 황희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게다가 좋은 마음으로 한 것을 지나치게 몰아붙이는 황희가 이해가 되지 않았던지 옆에 있던 맹사성이 물었다. “김종서는 유능한 사람인데 어찌 대감께서는 유독 그에 대해서만 엄격하십니까?” 이에 황희가 답했다. “김종서는 성격이 고매하고 기운이 날쌔 일을 과감하게 처리해 뒷날 우리 자리에 앉게 될 것이오. 그러나 그때 신중하지 않고 자만하면 일을 그르칠까 염려스러워 내가 일부러 그의 오만한 기운을 꺾으려는 것이오.”

김종서에게 동시에 존재하는 강직과 오만을 다스리지 않으면 장차 큰 화를 입게 될 것으로 본 것이다. 황희가 김종서를 책망한 또 하나의 일화가 있다. 세종대왕은 홀로 오지에서 6진개척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온 김종서에게 우의정을 내리려 했다. 정승급으로 올리려 한 것이다. 이에 황희가 반대해 병조판서를 맡게 된다. 그때 국정을 논하는 자리에서 김종서가 조금 삐딱하게 앉아 있는 것을 본 황희는 “여봐라! 병판(병조판서) 앉은 자리가 기운 듯하니 바로 잡아드려라”고 은근히 꾸짖었다.

문종은 재위 2년 만에 세상을 떠나면서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김종서, 우의정 정분에게 12세의 어린 단종을 부탁했다. 김종서는 단종 체제하에서 전권을 장악했다. 그러면 그는 반드시 단종을 지켜냈어야 한다. 명분론 중심의 역사해석에서는 패자(敗者)에 대한 동정심과 어우러져 김종서를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는데 동의하기 힘들다.

수양대군의 움직임은 이미 도성의 뜻있는 사람이라면 다 알고있는 사안이었다. 그렇다면 최대한 경계를 하며 대비를 했어야 한다. 역사학자들은 바로 이 지점을 놓치는 우를 범하곤 한다. 게다가 김종서는 힘의 집중으로 인해 오만했던 면이 있었고 동시에 방심한 면도 있었다. 오만과 방심은 일을 그르치는 만화(萬禍)의 근원이다. 김종서의 오만과 방심은 한 개인의 불행으로 끝나지 않고 조선의 역사적 흐름에 심대한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김종서를 실록의 맥락에서 읽으면 이처럼 전혀 다른 모습을 보게 된다.

글·이한우 (조선일보 기획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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