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정확한 비교는 어렵지만 실록에 술과 관련된 유명한 일화를 남긴 사람들을 중심으로 3대 주당을 고른다면 누가 세 손가락 안에 들 수 있을까?
먼저 세종시대의 유명한 학신(學臣) 윤회(尹淮·1380~1436)를 꼽을 수 있다. 윤회는 아버지 윤소종에 이어 두 대에 걸친 대학자로 여말선초에 크게 이름을 날렸다. 특히 부자(父子) 모두 송나라 진덕수의 <대학연의>에 정통하여 각각 태종과 세종에게 그 핵심을 전수하여 조선초 문치의 확립에 크게 기여했다.
태종에 이어 세종도 그의 학문적 재능을 높이 평가해 집현전과 예문관 등의 요직을 두루 맡겼다. 그가 죽었을 때 실록은 이렇게 적고 있다. “천성이 술을 즐기니 두 임금(태종과 세종)께서 여러 번 꾸짖어 금하게 하였으나 끝내 술을 끊지 못했다.” 이처럼 술을 즐기면서도 윤회는 세종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집현전 프로젝트 <자치통감 훈의>의 편찬작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두 번째는 누가 뭐래도 세조(재위 1455~1468)일 것이다. 학계에서는 아예 세조의 정치스타일을 ‘주석(酒席)정치’라고 부르기도 한다. 국정을 늘 술자리에서 풀어나갔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신숙주나 정인지는 만취상태에서 실수를 하는 바람에 큰 위험에 처하기도 했다. 신숙주는 세조가 자신의 팔을 비틀어보라고 했을 때 술에 취해 힘껏 비트는 바람에 세조의 입에서 신음소리까지 튀어나오는 일이 있었다. 그러자 한명회는 신숙주의 하인으로 하여금 이날 밤에는 무조건 책을 보지 말고 잠에 들게 하라고 신신당부했다.
아니나 다를까 세조는 얼마 후 사람을 보내 신숙주가 자는지 여부를 확인하고 오도록 명했다. 자지 않고 책을 본다면 자신의 팔을 비튼 행위는 의도적이라 보고 처벌하려 했기 때문이다. 한명회의 기지로 신숙주는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정인지도 세조에게 ‘너(爾)’라고 불렀다가 두 번이나 곤경에 처했다. 다행히 세조는 정인지를 워낙 오래 알아왔고 그의 재능을 아꼈기 때문에 용서해주었다.
아마도 주당 트리오에 포함시키지 않으면 가장 서운해할 사람이 바로 정철(鄭澈·1536~1593)이다. 당대의 정객이요 시인이었던 그는 술을 너무 좋아했고 또 이로 인해 잦은 문제를 일으켰다. <선조수정실록>은 훗날 정철과 같은 당파인 서인들이 주도해서 고쳐 쓴 실록이다. 따라서 여기에 정철의 평가는 비교적 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술이나 편협한 마음가짐으로 인한 문제는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다.
“만일 그를 강호 산림의 사이에 두었더라면 잘 처신했을 것인데, 지위가 삼사(三司)의 끝까지 오르고 몸이 장상(將相)을 겸하였으니, 그에 맞는 벼슬이 아니었다. 정철은 중년 이후로 주색에 병들어 자신을 충분히 단속하지 못한 데다가 사악한 사람을 너무 미워하여 술이 취하면 곧 면전에서 꾸짖으면서 권귀(權貴)를 가리지 않았다.”
그 바람에 오해도 많이 받았던 정철이었다.
‘한 잔 먹세 그려 또 한 잔 먹세 그려’로 시작하는 그의 ‘장진주사(將進酒辭)’는 예나 지금이나 유명하다. 지금 읽어보아도 혼탁한 세상, 술로 잊어보려는 낭만가객의 흥취가 진하게 전해져 온다. 그러나 주당은 대부분 사후에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는 점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겠다.
글·이한우 (조선일보 기획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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