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2011년 1월 31일. 모두가 숨죽이고 지켜보는 가운데 프로농구 신인 지명 추첨(드래프트)이 진행됐다. 네 가지 색깔의 구슬들이 추첨 기계 안에서 요란하게 움직였다. 드디어 첫 번째 구슬이 모습을 드러냈다.
빨간색. 진행자는 “안양 KGC인삼공사”를 외쳤다. 장내에서 함성이 터졌다. 이상범 감독은 빨간색 유니폼을 들고 어디서나 눈에 띄는 신장 2미터의 장신, 박지성을 조금 닮은 듯한 중앙대 졸업예정자를 찾아갔다. 그리고 주저없이 그에게 유니폼을 입혔다.
만 2년 동안 온갖 수모와 비난을 감수하면서 꿋꿋하게 진행한 인삼공사의 팀 재건 작업, 리빌딩(rebuilding)은 ‘오세근 드래프트’로 비로소 완성됐다.
오세근의 성인 무대 첫 경기는 2006년 11월 20일. 잠실학생체육관에서 열린 2006 산업은행배 농구대잔치 첫날이었다. 인천 제물포고 졸업예정자 자격으로 중앙대 유니폼을 입은 오세근은 상무를 상대로 대학 무대 데뷔전을 치렀다. 물론 주전은 아니었다. 그러나 센터 함지훈(현 모비스)이 2쿼터 막판 허리를 다치는 바람에 출전 기회가 찾아왔다. 상대는 프로 형님들. 잘하면 다행, 못해도 본전이라 여겨졌지만 오세근의 생각은 달랐다. 21점, 25리바운드, 3블록슛 그리고 93대79 대승. 오세근이 남긴 기념비적인 성적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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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근은 대학교 1학년인 2007년부터 국가대표로 활약했다. 서장훈과 김주성의 대를 이어갈 토종 빅맨으로 각광받았다. 기대와 관심은 혹사로 이어졌다. 대학 시절부터 휴식은 남 얘기였다. 대학부경기와 온갖 국제대회 출전 등으로 쉴 날이 없었다. 고질적인 발목부상, 그보다 더 심각한 족저근막염이 이때부터 말썽을 부렸다. 대학 시절 오세근을 만났을 때 그의 입에서 “아프지 않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한번도 없다.
족저근막염은 운동 선수가 가장 두려워하는 부상 중 하나다.
발바닥의 아치 부분에 있는 근섬유를 족저근막이라 하는데, 몸을 지탱하고 충격을 완화시켜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여기에 염증이 생기면 말로는 설명 못 할 통증이 생긴다. 특히 농구선수들이 족저근막염으로 고생하는 경우가 많은데 모두가 “쉬는 것 외에는 답이 없다”고 말한다. 갈 길 바쁜 시즌 중이라고 해도 선수가 통증을 호소하면 코칭스태프는 최소 2주, 길게는 한 달 이상 휴식을 준다.
통증이 사라질 때까지 벤치에 앉혀두는 게 보통이다.
올해 초, 인삼공사와의 홈경기를 앞둔 한 구단 관계자는 “아까 세근이를 만났는데 ‘대학 때 통증이 재발했어요’라며 우는 목소리더라. 족저근막염이 또 찾아온 모양”이라며 안타까워했다. 그런데도 그날 오세근은 벤치를 지키는 대신 코트로 나갔다. 31분 동안 13점, 8리바운드, 1블록슛을 기록했고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통증이 하루아침에 사라질 리 없다. 그래도 참고 뛰었다. 그 즈음에 하승진(KCC)과 부딪혀 입술을 22바늘 꿰매야 했다. 두어 경기를 결장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이틀 후 코트에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은 불편하고 발은 절뚝이는 상태로 골밑에 들어가 한바탕 전쟁을 치렀다. 그날은 22점을 올리며 승리의 주역이 됐다.
책임감이란 말, 누구나 쉽게 쓰는 표현이지만 당사자에게는 이보다 더 부담되는 표현도 없다. 오세근은 인삼공사 리빌딩의 화룡점정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받고 입단했다. 예상대로 개인 성적은 물론이고 팀 성적도 좋았다. 지난 2시즌 동안 32승76패에 그쳤던 인삼공사는 최근 막을 내린 2011~2012 시즌에 36승18패를 기록하며 정규리그 2위를 차지했다. 구단 역사상 최고의 성적이다. 오세근은 15.0점, 8.1리바운드, 1.3블록슛을 올리며 어느 때보다 거셌던 신인 열풍의 중심에서 활약했다.
오세근의 입단으로 인삼공사는 고질적인 약점이었던 골밑 부재를 한번에 해결했다. 하지만 오세근은 항상 말 못 할 통증을 안고 매일밤 전장 같은 코트에 나서야 했다. 고통과 인내는 결국 달콤한 열매가 되어 돌아왔다.
프로농구 챔피언결정전. 인삼공사의 상대 원주 동부는 정규리그 역대 최다승(44승), 리그 최다연승(16경기), 사상 첫 8할 승률(81.5퍼센트) 등 온갖 기록을 세운 역대 최강의 팀이다. 모두가 동부의 일방적인 승리가 될 것이라 예상했다.
인삼공사는 발로 상대를 압도하는 모든 전술을 들고 나왔다.
빠른 공수전환, 전면 강압수비 심지어 전면 강압수비 후 곧바로 지역방어로 전환하는 난이도 높은 수비도 들고 나왔다. 인삼공사 선수들은 ‘우리가 상대보다 2배 더 뛰어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미 발목과 발바닥이 지칠 대로 지친 오세근에게는 가혹한 전술이었지만 늘 그래왔듯이 참고 뛰었다. 동부의 막강한 트리플 타워를 상대로 굳건히 골밑을 지켜냈다. 평균 17.5점, 5.3리바운드, 2.2어시스트, 마지막 4쿼터 평균 득점은 무려 5.8점. 인삼공사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4승2패로 우승했고 동부의 파상공세를 온몸으로 받아낸 오세근에게는 신인 최초의 챔피언결정전 MVP라는 값진 열매가 돌아갔다.![]()
“김주성 선배를 넘어서는 것이 꿈이다.” 신인 드래프트 당시 오세근이 남긴 당찬 한 마디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챔피언결정전 무대에서 오세근은 김주성을 뛰어넘었다. 우승이 확정된 지 3일 후인 지난 4월 9일 프로농구 시상식 자리에서 오세근을 만난 이규섭(삼성)은 “이제 네가 KBL을 먹었구나”라는 조금은 거친 표현으로 후배의 우승을 축하했다. 오세근은 몸둘 바를 몰라 했지만 근처에 있던 모두가 웃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국제무대에서도 검증이 끝난 탄탄한 실력, 확고한 목표 의식, 부상에 아랑곳하지 않는 투혼, 무엇보다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감을 지키겠다는 강한 의지까지. 박지성의 외모를 닮은 오세근은 그 정신까지도 박지성을 많이 닮았다. 농구 팬들은 올해 새로운 프로농구 아이콘의 탄생을 지켜봤다.
글·박세운 (CBS 스포츠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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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